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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주의 신실하심으로 산다”

물이 없다며 원망과 다툼의 싸움으로 들끓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하지만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는 죄성을 쏟아내는 백성들이 아닌
반석 위에 서계신 하나님을 회초리질하고선 반석을 쪼개어 생명의 물을 쏟아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 반석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를 흘려, 죄인들에게 생명의 물을 내주셨습니다.
은혜로 살아난 백성들이 르비딤의 메마른 땅에서 반석을 뚫고 터져 나온 생명수를 마시며
이제 좀 살았다 하고 한숨을 돌리는 순간,
예상도 하지 못한 아말렉의 습격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와우 연속법’이라는 문법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물이 터지는 장면과 전쟁이 터지는 장면이 마치 한 동작처럼 이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은혜의 단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칼바람 부는 전장으로 내몰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의 삶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아말렉의 공격은 단순한 약탈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아말렉은 그들의 생활 터전인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라이벌로 부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직 연약할 때에,
물 없는 르비딤에 들어가 가장 약해진 틈을 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지면에서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아말렉’도 이와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건강의 악화,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 압박, 이유 없는 비난과 관계의 갈등은 우리의 신앙과 자존감을 통째로 부수려 듭니다.
이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과연 이 전쟁 같은 인생을 버텨낼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서
전쟁터에 내몰리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질문에 답변합니다.
이때 ‘모세가 손을 들어 올렸다’는 동작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 히브리어 동사는
통상적인 기도의 행동으로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동사 ‘룸’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제사에서 제물을 높이 들어 올릴 때 사용하는 ‘전시’와 ‘봉헌’의 단어입니다.
즉, 모세는 지금 이 전쟁에서 백성들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백성들의 눈앞에, 그리고 그들의 대적 앞에 전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미 반석에서 자신을 쪼개어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장에 선포함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였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여호수아의 칼날이 아니라,
높이 들린 지팡이, 은혜의 표징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산 위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반석(그리스도)이 쪼개지던 그 순간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산 위의 지팡이는 광야의 놋뱀으로, 그리고 마침내 골고다의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확신, 즉
“나를 위해 자신을 치신 분이 이 외부의 적 앞에서도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기억하고 산에 올라,
손을 들어 하나님의 지팡이를 전쟁터 위 가장 높은 곳에 들어 올렸습니다.
모세의 손이 들려있는 동안,
전쟁터의 백성들 눈앞에 지팡이가 선명하게 보이는 동안,
이스라엘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민족의 명운을 건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성경은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던 모세의 손을 가리켜
“그의 손이 ‘에무나’했다(해가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기록합니다.
한글 성경은 이 ‘에무나’를 주로 ‘신실함’이라고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진정한 온기는 호세아서에서 발견됩니다.
바람난 아내 고멜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아내로 삼는 호세아의 사랑을 통해,
“내가 진실로(에무나) 너에게 장가들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에서 ‘에무나’가 사용됩니다.
즉 “너는 나를 버렸어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는 신랑되신 그분의 성실함이 바로 에무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에무나)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에무나)으로 살리라”는 이 선언은 “내 독기로 버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놓칠지라도 나를 붙들고 있는 보좌의 손이 신실하시기에, 결국 내가 버텨지게 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격’으로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내게서 자라나는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나에게 부어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을 때, 우리가 쓰러지지 않는 것은 주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버팀’의 여정에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팔이 떨려오는 모세를 위해 사람을 보내어 주십니다.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 앉히고 양옆에서 손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성령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묶어주십니다.
에무나는 혼자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의 무거워진 손밑에 슬며시 돌 하나를 괴어주는 공동체의 사랑 속에서 완성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는 결국 해가 질 때까지, 최후 승리까지 버텨낼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그의 신실함으로(에무나) 말미암아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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