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13과 시편입니다.
시편은 여러 모로 굉장히 특별한 성경입니다.
매주 주일 예배시간에는 시편을 읽습니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에는 시편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외우는 말씀 역시 시편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곳곳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시편의 시들은 약 1,000년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 있었고,
그동안 이스라엘이 지나온 모든 개인적, 국가적, 우주적인 역사를 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최종 편집이 시작되었던 시기는 바벨론 포로 시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해 이방 나라의 포로로 끌려갔던 그 암울하고 황량한 시기 동안
시편은 이스라엘을 버티게 해 준 재료였습니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창조주를 신뢰하고 소망하도록
그들을 지켜주던 연료이자 자원이 시편이었던 것입니다.
그건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경이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은 선지서가 아니라 시편입니다.
시편이 바라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
우리의 슬픔과 고통, 불의와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방향성은 다른 성경과 다릅니다.
시편의 첫 번째 독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다른 성경들은 주로 위에서 아래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시편은 시인들이 하나님께 이야기한 찬양과 기도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입니다.
시인들이 시편을 쓴 이유는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그들은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감탄과 탄성의 언어인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시인들이 맛보았던 하나님의 임재로 초대되어
그들과 함께 시편의 언어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찬송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편의 세계 입구에서 우리는 매우 당황하게 됩니다.
시편의 장르 중에는 저주시가 있습니다.
내가 증오하는 그를 빨리 죽게 해달라고,
그의 가족이 과부와 고아가 되어 떠돌아다니게 해달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히브리어로 테힐림, 찬송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편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장르는
슬픔의 시, 탄식시입니다.
거기서 시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온갖 불평과 불만을 쏟아붓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내가 고통 당할 때 주무시고 계신다,
내게서 고개를 좀 돌리셔야 내가 살 것 같다며
그들이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낀 주관적인 생각들을 하나님 면전에 던집니다.
그걸 시편은 찬양이라 부릅니다.
시편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름답지 않은 우리의 마음의 언어를 드러내도 괜찮은
인격적 관계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저주의 언어를 하나님께 쏟아 놓음으로 우리의 분노가 우리를 삼키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 모든 복수심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저주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느낌으로
화를 내도 괜찮은 관계가 하나님의 우리와의 관계라고 탄식시는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솔직한 고백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는 이들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한량 없는 은혜로 초대하셔서
그들의 고백을 찬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인 시편 100편은 그 찬양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이라고 이야힙니다.
예배시로 시편 100편을 쓴 시인은 예배에 참여한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온 땅아’라고 외치며 온 세상 수많은 사람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이는 예배는 곧 온 세상을 향한 메시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들에게 여전히 온 세상의 왕은 유튜브도, 주식도, 재벌, 부동산, 대기업도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살고 있다고,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자고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이 노래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시 10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 영원하신 은혜에 대한 노래는 우리와 하나님이 맺은 은혜롭고 인격적인 관계를
우리의 짧은 인생으로 제한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선언을 이루시기 위해 양 같은 우리의 목자로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무도 그가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없는 양 같은 우리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저주시를 노래한 시인의 슬픔을 경험합니다.
슬픔의 시를 노래한 시인처럼 하나님께 왜 자기를 버리냐고 외칩니다.
그런 목자이시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우리의 슬픔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수 있습니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래서 우리는 저주시와 탄식시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당하신 우리의 고난을 보며 그 은혜의 깊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저주시와 탄식시를 노래하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맛보아 알아가게 하는 자들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눔 질문>
1. 오늘 말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말이지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어떻게 하나요?
3. 내가 하나님께 가장 많이 하는 말과 하고 싶었던 말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4. 내가 분노와 슬픔으로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나요?
5. 오늘 들은 말씀으로 기도를 해본다면 어떻게 적을 수 있을까요?
<결론>
탄식과 저주를 찬양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우리의 영혼은 위로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문으로 들어간 우리를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주님을 따라 그 은혜를 흘려보내는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맛보아 알아가는 우리 아이들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