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된 개역개정 성경을 보았을 때 창세기 24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우물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물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베에르’라는 단어와 ‘아인’이라는 단어가 혼용되어 사용됩니다.
우물이란 뜻으로써 ‘아인’이라는 히브리어는 7번,
‘베에르’라는 히브리어로는 2번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인’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눈’입니다.
사물을 바라볼 때 사용하는 감각 기관인 바로 그 ‘눈’입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24장에선 ‘눈’이라는 뜻으로도 ‘아인’이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발견하여 ‘눈을 들어 바라보는’ 장면과 리브가가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이삭을 ‘눈을 들어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깐 총 9번의 ‘아인’이 사용된 것입니다.
이삭의 신부인 리브가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우물이었고, 이삭도 브엘라해로이라는 우물 관련 지역에서 돌아왔다고 설명합니다.
신랑과 신부 모두 우물에서 서로에게로 온 것이죠.
그리고 ‘눈’을 들어 서로를 마주 바라봅니다.
우물에서 온 신랑의 ‘눈’ 안에 신부가, 우물에서 온 신부의 ‘눈’ 안에 신랑이 있습니다.
이렇듯 창세기 24장에서 눈과 우물은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를 혼용하여 사용하여 문예적 연관성을 갖도록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에서뿐 아니라, 우물은 성경에서 주로 남녀 간의 중요한 만남의 배경이 되곤 합니다.
야곱과 라헬이 처음 만나는 장소가 우물이었고,
모세와 십보라가 처음 만난 장소도 우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가서 4장 12절에서 신부를 가리켜 ‘닫힌 우물’이라고도 묘사합니다.
그것은 분명, 결혼 안에서의 남녀란 서로에게 우물과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동의 일상에서 물은 곧 생명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는 생명 같은 존재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갈증을 해갈해주는 사람입니다.
온 세상이 등을 돌려도 끝까지 내 편인 사람,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만족을 얻지 못할지라도 아내의 격려 한마디에 용기를 얻고,
남편의 위로 한마디에 힘을 회복하는 것이 부부의 세계입니다.
우물의 그 깊은 곳에서 길러 나오는 시원하고 청량한 음료처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연합, 그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기쁨과 둘만의 은밀한 기쁨이 있는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그렇기에 부부는 ‘닫힌 우물’입니다.
지나가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하여 닫혀있는 나만의 샘입니다.
서로 간의 사랑으로 충분히 채워질 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우물이 결혼의 상징이 된 것은 이와 같은 해갈의 깊은 만족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가성에서 남편 다섯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여인을 만나 주실 때, 우물가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직접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주시겠다는, 영적인 깊은 만족을 주는 진정한 신랑이 되어주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와같이,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단순한 결혼 생활에 대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녀의 연합은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유비로서 상징의 그릇이라고 설명합니다.(엡5:31,32)
하나님은, 이삭의 신붓감으로 리브가를 준비하셨듯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물에서 내려온 신부와 우물에서 올라온 신랑이, 서로의 눈을 들어 바라보는 모습으로써,
창세기 22장에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는 그 준비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계시하여 주십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준비하심이란, 신부로서의 교회를 세우심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목적이고,
계시된 성경의 결론이며,
모든 신앙인이 도달해야 할 종착지이고,
주의 사랑이 맺어지는 열매이며,
복음의 절정이자, 만족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순결한 신부로서 교회를 세우시어, 우리에게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 우리를 교회 안에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생명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순결한 주의 신부, 교회로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