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야곱을 조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야곱이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표현이 아닙니다.
조용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탐”은 원래 완전하다, 온전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야곱은 완전한 자였던 것이죠.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완전하다고 평가된 인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노아나, 욥 정도만이 완전하다는 표현으로 묘사된 몇 안 되는 인물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노아나 욥 정도로 완전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던 에녹에게조차 사용되지 않았던 표현으로 야곱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평가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6장에서 보여지는 야곱의 모습은 사실 ‘완전한 자’로서 기대감을 받는 자가 보여주어야 할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배고픈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팔게 하는 것은 온전한 자의 적절한 행동이나 공정한 행동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에서 그려지는 야곱의 모습과 완전한 자라고 설명한 성경의 평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바꾸게 하다닛, 야곱의 뻔뻔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장자권이라는 것은 다른 형제들이 받아야 할 유산의 갑절을 상속 받게 될 권리가 포함됩니다.
에서와 야곱이 상속받을 재산은 아버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려받은 재산에서 더욱 증진된 것입니다.
장자에게는 그 모든 것의 2/3가 상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엄청난 재산의 가치를 고작 팥죽 한 그릇의 가치와 동일하게 놓고 맞바꾸려 하는 모습에서 야곱의 뻔뻔함과 비열함이 숨겨지지 못하고 드러납니다.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야곱의 모습은 첫 사람 아담을 먹음직한 선악과로 유혹했던 뱀의 모습마저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발꿈치라는 뜻의 야곱에 이름은 창3:15에서 예언된 발꿈치를 상하게 할 뱀의 후손을 연상케 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야곱은 완전한 자 보단 원수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고려하여, 차마 히브리어 ‘탐’을 완전하다고 번역하지 못하고 조용하다고 번역한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더욱더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에서가 야곱의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지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겼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에서의 말대로 배가 고파 곧 죽을 것 같은 지경이었다 하더라도
동생의 장막을 나와 어머니 리브가의 장막이나 다른 사람들의 장막으로 향했다면 얼마든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잠시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맞바꾸었다는 것은 바꿔말해 에서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바보이거나,
바보가 아니라면 정말 장자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의 가치만 못하게 여겼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에서는 야곱의 사기 행각에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신 약속의 메시야가 오실 계보를 잇는 자리를 하찮게 여기고 이탈한 배신자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권리뿐 아니라 책임과 의무까지 경멸한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치우쳐 자신의 악한 본성만을 유감없이 발휘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하고 뻔뻔한 난리 통 속에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 사건 때와 같이, 인간의 가장 패악한 순간에 하나님의 가장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게 하심과 같습니다.
성경은 야곱의 가장 비열한 순간에 그를 완전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야곱의 어떠함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역사가 열매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에 야곱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야곱의 비열한 수단과 노력과 쟁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의 잘남이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삶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니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잘못으로 하나님의 대사를 그르치는 것이 아니니 마음 졸일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악한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함으로,
주의 말씀을 소중히 여김으로,
아들 삼아주신 은총을 감사히 여김으로 그 지위를 버텨낼 때 은혜 안에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