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
이번 주 본문은 열왕기하 18~20장, 히스기야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의 이전 시대인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의 이야기입니다.
아하스는 여호사밧에서 그의 이전 왕인 요담까지 이어지는 유다의 선한 왕의 계보를 끊은 왕입니다.
그는 유다 왕 곧 다윗의 자손이지만 다윗의 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길을 좇습니다.
자기 아들을 이방 족속의 풍습인 인신제사로 드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그가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길 끝에 있던 호세아 왕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매우 길게 설명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앗수르에 의해 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망한 건 그들의 구원이시며 목자이신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이방 풍습에 따라 우상을 섬겨 여호와를 격노하게 합니다
(격노하다는 11번이나 사용됩니다).
심지어 선지자를 통해 돌이켜 회개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마저 무시했기에
그들은 망하고 만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자연스레 그 이스라엘의 길을 따랐던 아하스의 유다 역시 망하게 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길에서 돌이키는 개혁이 있어야 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개혁을 일으키는 이가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아하스가 끊어버린 선한 왕의 계보를 이어가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들도 하지 못했던 우상 파괴 및 산당 철폐까지 시행합니다.
심지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가 만든 놋뱀까지
우상으로 사용되자 부숴버립니다.
이를 성경은 그가 여호와와 연합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연합이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사랑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내는
분별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는 아하스의 모든 것에서 떠나게 되고, 무엇을 하든 성공하게 됩니다.
블레셋을 점령하고 앗수르에게 반역해 그를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성경은 바로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배역으로 그들이 앗수르에게 망했다고 기록한 뒤
곧바로 앗수르에 의해 유다 성읍이 점령당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앗수르의 공격에 대한 히스기야의 시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길을 따르지 않았던 그가
이스라엘의 길을 따랐던 아하스도 당하지 않았던 앗수르의 공격을
이스라엘과 같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아하스가 행한 것과 같은 일을 합니다.
앗수르 왕이 요구한 대로 여호와의 성전 기둥을 입힌 금을 벗기고 성전 창고에서 은금 보석들을 꺼내
그에게 가져다 줍니다.
아하스의 세계관과 같이 그는 이 세상이 앗수르의 세상이며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석으로 그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그의 세 군대 장관을 보내 예루살렘을 점령하려 합니다.
그 중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세 신하에게는 물론
성에 있던 모든 유다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아하스가 한 때 의지했던 이집트가 너희를 구원할 수 없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거라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세상 어떤 신이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였느냐.
여호와 역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없다.”
이를 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돌아가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모욕임을 지적하며
이사야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이에 이사야는 그를 향한 여호와의 심판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답합니다.
이후 산헤립이 랍사게의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한번 더 보내자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라고,
앗수르 왕들이 멸한 나라의 헛된 신들과 달리 하나님은 창조주시라고,
우리를 구원해 하나님만이 홀로 하나님이심을 보여달라고 구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그저 산헤립에 대한 심판으로 답하지 않으십니다.
몇 년이 걸리겠지만 유다는 회복하게 될 것이며
남은 자를 통해 유다를 회복하시고 또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실 거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앗수르 진영에서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죽입니다.
이를 보고 돌아간 산헤립은 부하들의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히스기야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고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그 때 히스기야는 자기의 충성스러운 과거에 호소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치료하셔서 15년을 더 살게 해주십니다.
그 때 바벨론의 사절단이 히스기야의 투병 소식을 듣고 유다를 방문합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엄청나게 기뻐합니다.
당시 앗수르를 물리친 히스기야는 대내외적으로 엄청나게 존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고,
이를 증명해주는 게 바로 이 사절단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은 대표적인 반앗수르 세력의 신흥세력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동지처럼 여겨졌기에 히스기야는 그를 의지하고 그와 동맹을 맺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힘을 보여주는 그의 왕궁 보물들과 무기고와 모든 창고들을 보여줍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여기에 성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그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이
앗수르로부터 그를 구원한 진정한 힘과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들이 어디서 온 자들인지 묻자
히스기야는 먼 곳 바벨론에서 온 자들이라고 답합니다.
먼 곳에서 온 자들이니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바벨론이 유다를 망하게 하고 포로로 끌고 갈 거라 예언합니다.
나의 구원이 되시는 여호와를 잊어버려 결국 그의 시대에서만
유다를 지켜냅니다.
이는 결국 히스기야 역시 영원한 왕권을 받아 다스릴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약할 때나 강할 때 동일한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동일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진정한 유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바벨론 사절단이 히스기야를 만난 곳은 왕궁이었지만
동방 박사들이 왕궁에서 예수님을 만난지 못합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 그에게 경배합니다.
탄생의 모습이 아기처럼 나약했던 것과 같이 죽음의 모습 역시 예수님은 나약했습니다.
그러나 둘 모두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되십니다.
히스기야의 연장전은 그의 의로움을 통해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연장전은 그분의 의로움을 통해 죽음을 삼키는 부활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히스기야 같은 우리는 그저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
죽음으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승리, 이 영광이 끝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이후에 있는 영원한 부활을 소망하고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영광이 빛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되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왕을 바라보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눔 질문>
1. 오늘 말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교회에 잘 다니는 친구와 잘 안 다니는 친구가 똑같이 어려운 문제를 만난다는 얘기를 들을 때 무슨 생각이 드나요?
그 때 나는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고 싶나요?
3.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은 어떤가요?
그 때 내가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요?
4.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절단에게 보여줘야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5. 내 마지막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은 내 삶을 어떻게 바라보게 하나요?
6. 오늘 말씀으로 기도문을 작성해 봅시다.
<결론>
여호와로 인한 성공이 앗수르로 인해 무너지자 좌절한 히스기야는,
결국 여호와로 인한 성공을 나로 인한 성공으로 여겨 유다의 멸망 예언을 듣습니다.
주님을 잊을 때 우리의 가장 큰 은혜의 시간은
그렇게 가장 큰 절망의 시간으로 변화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을 잊어 가장 큰 절망의 시간을 만나게 될 우리를 찾아와
그 절망을 구원과 부활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저마다 히스기야로 사는 우리 모두가 그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는 이 시간이길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