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내용>

총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는 그 내용에 따라
1~5장(서론,)
6~12장(이사야의 소명과 거룩한 씨),
13~23장(열방에 대한 메시지),
24~39장(심판과 축복에 대한 예언과 구원자로 추정되는 히스기야의 역사적 사건),
40~55장(구원에 대한 예언 1- 구원자인 여호와의 종),
56~66장(구원에 대한 예언 2- 여호와의 종을 따르는 여호와의 종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구원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사야서의 모든 내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이사야서 1~39장은 다윗의 후손, 40~55장은 여호와의 종, 56~66장은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답합니다.
각 구조의 답변들은 서로 독립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그 의미가 확장되고 발전되는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세부적으로 볼 때 구원자에 대한 첫 번째 답은 6:13에 나오는 거룩한 씨입니다.
여기서 씨는 ‘제라’인데 이는 창 3:15에서 사탄의 머리를 부술 자로 예언된 여인의 후손(씨, 제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7:14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사야 7장에서 그 구원자의 첫 번째 후보로 아하스가 등장하지만 아하스는 여호와를 거절함으로 구원자가 아님이 증명됩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구원에 대한 한 징조로 구원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구원자는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낳는 아기이며, 그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말합니다.
즉, 결혼하지 않은 여인에게서 태어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할 그 아기가 그 구원자인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내용은 이 구원자는 단순히 유다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구원을 이룰 자임을 이야기합니다.

9장에서 그 구원자는 다윗의 왕좌에 앉은 다윗의 후손이자 사람인 동시에 신성을 가진 존재로 설명됩니다.

11장에서 그 구원자는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임한 자라고 소개됩니다.

그리고 36~39장은 아하스에 이어 두 번째 구원자 후보로 히스기야를 제시합니다.
37장까지 히스기야는 앗수르 앞에서 믿음으로 유다에 구원을 가져옴으로 그 구원자인 것처럼 보였지만
38~39장에서 그는 바벨론의 패망을 가져올 비밀을 제공합니다. 그 역시 구원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1~39장까지의 결론은 이 구원자는
창 3:15의 말씀을 성취하여 유다를 구원함으로 열방을 구원하는 여호와의 영이 임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들어간 유다를 대상으로 쓰여진 40장~66장에서
그 구원자는 여호와의 종으로 소개됩니다.
42장, 49장에서 나오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종의 노래에서는
그 종의 사역 곧 이스라엘을 돌이키고 정의를 베풀어 열방을 회복하는 사역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50장, 53장은 지금껏 설명해 왔던 여호와의 종에 대한 모든 기대와 소망을 부수는 반전이 등장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인 마지막 네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그 시작인 이사야 52:13에서 여호와의 종은
지혜롭게 행함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고 높이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그는 너무 많이 맞고, 피를 흘려 상함으로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는 몰골로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그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그의 모습은지금껏 이야기되어 왔던 종의 소개와 전혀 걸맞지 않습니다.
그에겐 우리의 눈길을 끌 만한 어떤 위엄이나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는 아픔과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의 거절을 당하며,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와 다른 우리는 그를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등장합니다.
그가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한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의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사실상 여호와의 종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산산조각냅니다.
여호와의 종이 고난 받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내가 조금 괜찮은 줄 알았던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당한 더 근본적인 이유인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여호와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대신해 그를 고난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침묵합니다.
그 죽음의 이유인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택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고통의 결과를 보고 만족합니다.
그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높아지게 됩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신약에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만큼
모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빌립보서 2:5~11은 예수님이 여호와의 종이 되신 것은 그의 열등함이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스스로 종이 되셔서
그가 당하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자가 바로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우리 안에 그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비극을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이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 형벌을 예수님이 모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비극은 형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짊어지셔서 우리로 그분의 삶을 따르게 하시는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때에나 무너지지 않는 기대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것,
심지어 고난을 통해서도 그 목적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따라 지어지고 완성되어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를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오늘로 사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여호와의 종들입니다.

그 종들의 자리로 오늘 말씀은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눔 질문>

1. 오늘 말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 힘든 이유는 원래 무엇이었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이유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3. 뭔가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벌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그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4. 우리가 갖고 있는 기대에는 무엇이 있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로 갖게 된 기대에는 무엇이 있나요?

 

5. 오늘 말씀의 내용으로 기도문을 작성해 봅시다.

 

 

<결론>

하나님의 형벌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 멸시와 거부로 반응하는 우리에게
이사야는 그게 그분이 감당하신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나의 이야기로 삼아
그분을 따르는 여호와의 종들이 되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우리 아이들 모두 그 부름을 따라 나아가 십자가가 보여주는 기대할 수 없는 우리의 삶에
부활이라는 기대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이 시간이길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