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는 시작부터 선지자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충격의 선지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세지를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요나는 못마땅함을 느낍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민족의 원수를 심판하시겠다는데 요나는 대체 무엇이 불만인 것일까요?
그것은, 그저 하나님이 그의 작정대로 일하시면 될 터인데도 일부러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지 요나가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불만을 느낀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길 거부합니다.
놀랍게도 요나는 니느웨로 향하여 가지 않고 단순히 버티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반항으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눈빛이 향해있는 그곳의 정반대로 가려 합니다.
그렇게 선택한 곳은 당시 세상의 끝인 다시스, 곧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치던 요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을 만나게 되고,
갑판 아래 잠들어 있던 요나는 결국 제비뽑기를 통해 자신의 불순종이 드러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나는 폭풍우 치는 깊은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다는 잠잠해졌고, 하나님께서는 미리 준비시킨 물고기로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사흘 후에 그를 육지에 토해놓게 하셨습니다.
사실 요나 이야기를 읽는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 물고기에게 쏠려있습니다.
과연 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 진위 여부에 따라
요나서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교훈을 위해 꾸며진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실합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기에 진정성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키시기로 하신다면야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생존하는 기적도 믿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물속에서 5분만 숨을 참아도 그렇게 괴로운데,
물고기 뱃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 채 사흘간 살아있었다면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할 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마12:39-40) 하셨습니다.
이때 요나의 표적이란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표적,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표적을 말합니다.
따라서 요나의 표적이란 분명,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은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던져지고 다시 부활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즉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 죽었으나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내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죽지 않고 생존해 내는 기적보다 더 믿기 힘든 기적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하실 분이 혹시 있을까요?
그러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부활한 사건을 포함하여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많은 기적이 이미 있습니다.
이렇듯 요나서에서 요나가 겪은 일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예표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요나가 폭풍 속의 배 아래에서 잠들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풍랑이 이는 배에서 주무셨던 적이 있습니다.
선원들이 잠이 든 요나를 깨웠듯, 예수님은 기도하다 잠든 제자들을 깨우셨습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두고 제비를 뽑았던 것처럼, 로마군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던 것처럼 예수님도 죽음에 던져지셨고,
요나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바다를 건너던 중이었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다에 던져졌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불순종을 대신하기 위하여 죽음에 던져지셨습니다.
요나에게선 그의 죽음과 부활에, 그리고 심지어 그 이후의 행보에서조차 온전히 선한 점을 찾아내기 어렵지만,
예수님의 그 인생은 오직 온전히 거룩하고 선하신 희생뿐이었습니다.
완전히 상반된 요나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마치 십자가 사건에서 선하고 옳은 행동을 한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었음과 닮아 보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신비를 다 알 수 없지만,
인간의 가장 악랄한 결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선한 일이 되었던 것처럼,
요나의 가장 추악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장 찬란한 영광으로 요나를 덮어주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니느웨나 요나보다도 용서받을 자격 없는 우리지만 주님은 가장 찬란한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를 덮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