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는 많은 노동력과 많은 전투력을 보유하게 해주는 방법으로써 고대로부터 성행하던 결혼 문화였습니다.
자칭 ‘신들의 아들들이라 자부하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눈에 보기에 좋은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을 만큼
일부다처제는 노아 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매우 오래된 결혼 형태입니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는 현재까지도 그 문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만큼 역사와 전통이 있는 문화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동의와 합의 가운데 다수가 지지하는 전통이자 문화라 할지라도
일부다처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결혼 문화입니다.
일부다처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부다처제뿐 아니라 그 어떤 문화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문화의 행태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질서를 벗어난 행복감은 쾌락일 뿐이고 다른 누군가의 고혈을 짜내어 유지되는 죄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나누려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아브라함도 이삭도,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도,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선택된 가정들은 세상의 문화와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하여 가나안 문화에 물들어 버린 에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야곱 만큼은 세상 문화와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나안과 구별된 문화를 지켜나가게 하기 위하여 야곱을 하란 땅의 삼촌 라반에게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라반의 계략으로 인해 졸지에 아내가 둘이 되었습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야곱 가정의 시기와 경쟁은 이미 시작부터 예상된 바였습니다.
첫날밤을 지낸 자신의 아내가, 자신이 원했던 여자가 아니었다는 결과에 충격받은 야곱은
망설임 없이 일부다처제를 선택했으나,
이는 하나님의 질서보다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긴 결정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레아를 아내로 인정하고 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보다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야곱의 행보는 소신 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한편으론 분명 아쉬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레아와 라헬의 자존심 대결은 그들의 시녀인 빌하와 실바까지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된 아내들로 말미암아 자매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가정의 분위기는 격앙되고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공방은 라헬이 레아의 합환체를 얻기 위해 남편을 레아에게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합환체는 임신을 돕는다고 여겨진, 마치 산삼처럼 귀한 약재입니다.
라헬은 합환체만 있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환체를 얻어야만 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마치 에서가 팥죽을 먹지 못하면 배고파 죽을 것만 같아서 장자권의 의무와 책임을 가벼이 여기고 야곱에게 양도한 것처럼,
라헬은 남편의 사랑보다 더 귀하다 생각하는 것을 위하여 기꺼이 야곱을 레아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 이후, 레아는 서서히 진정한 아내로서 인정받아가게 됩니다.
귀한 것을 귀히 여기지 못하고,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가벼이 여기는 잘못은
실수라 하기에 너무나 중대하고, 악의가 없었다고 하기엔 너무나 개인적인 욕심에서 발원한 분명한 죄악입니다.
야곱의 눈을 속이고 그의 아내가 되는 사기에 가담한 레아도,
하나님의 질서를 외면하고 일부다처를 받아들인 야곱도,
아들을 얻고자 합환체 한 뿌리에 남편의 사랑을 넘겨준 라헬도,
어느 누구 할것 없이 타락과 탐욕으로 가득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구속사의 계보를 잇기에 부족한 사람들의 함량 미달 이야기를 볼 때,
우리의 생각엔 이런 잘못과 실수들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도 탈락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끝내 버리지 않으셨고,
레아의 소원뿐 아니라 라헬의 소원도 들으시고 요셉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실망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의 선하신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실망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사랑을 시작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전쟁은 치열했지만, 결국 이런 과정 속에서 12지파를 만들어 내십니다.
훗날 하나님께선 십자가에 예수를 달았던 인간의 죄악조차 그들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방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예수 믿으세요.
뜻을 바꾸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