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을 추적해온 라반은 아무 소득 없이 야곱을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지난밤 야곱과의 대화를 통해 진짜 도둑에 해당하는 사람은 라반이었음이 폭로되었으니
라반으로선 동행한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깎인 일이 되었습니다.
라반에게 야곱은 이제 만만하게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일종의 리스크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불평과 불만이 있는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겠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그 억울함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야곱은 예전의 집사람 야곱이 아니던 것입니다.
야곱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밤새 양 무리 사이에서 지내는 들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라반의 생각엔 야곱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사병을 일으켜 복수를 감행하러 돌아올 수도 있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상속권을 보장해주는 드라빔은 끝내 찾지 못했으니
혹여라도 야곱이 드라빔을 꼭꼭 숨겨놓았다가 훗날 라반 자신의 모든 재산에 상속을 요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야곱의 편이었습니다.
지난밤 찾아와 라반에게 경고할 만큼 하나님의 편애는 확실했습니다.
그러니 라반에게 있어 야곱은 관리해야 하는 ‘리스크’였습니다.
그를 제거할 수 없다면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과 맹세를 맺습니다.
상호 불가침 조약으로서 야곱은 돌기둥을 하나 세우고, 라반의 사람들에겐 돌 무더기를 쌓게 합니다.
라반과 야곱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이 돌무더기를 넘어서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한 언약에 상징이 둘입니다.
돌기둥과 돌무더기, 미스바와 갈르엣.
게다가 돌무더기를 부르는 이름도 둘입니다.
야곱은 돌무더기를 갈르엣이라 부르고 라반은 여갈사하두다라고 부릅니다.
야곱도 라반도 동일한 내용으로 맹세를 했지만, 그럼에도 야곱은 라반의 언약과 자신의 언약을 철저히 구별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라반이 부르는 하나님, 곧 나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야곱이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불렀지만, 그 하나님에 대해서 복수형 동사를 사용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르킬 때 히브리어 동사는 언제나 단수 동사여야 합니다.
즉 라반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따로 있고, 나홀의 하나님이 따로 있는,
나의 하나님이 따로고 너의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식의 다신교적 이해입니다.
야곱은 라반식의 인생과 관점, 신앙에 동의하거나 동조하지 않기 위하여 이름을 달리 불러 자신의 신앙을 구별합니다.
실제로 이 언약은 라반의 입장에서와 야곱의 입장에서 갖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선 일종의 절교와 단교의 선언입니다.
이로써 야곱은 일이 잘못될 경우 돌아갈 곳이 사라졌습니다.
쌍둥이 형 에서를 만나는 일에 더 이상 퇴로는 없습니다.
배수의 진을 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서로가 더 이상 함께하지 않겠다는 라반과의 맹세는 야곱에게 퇴로를 걱정하여 주저하게 할 만한 맹세였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주저함 없이 맹세를 맺었습니다.
이는 야곱의 맹세는 야곱에게 다른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돌무더기 외에 돌기둥을 따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곱은 자신과 단교하고자 하는 라반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기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야곱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던 20여 년 전에도 야곱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기념하여 돌기둥을 세웠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로 함입니다.
절교와 단교가 아니라 함께함에 대한 기대가 야곱을 이 맹세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야곱은 이삭이 두려워하는 이인 유일하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한 언약에 상징이 둘인 이유는 같은 현상에 바라는 기대와 의미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반의 하나님들은 끽해야 리스크인 사람과 절교하게 하는 신들이었지만,
야곱의 하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바를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다른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같은 일을 다르게 합니다.
동기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 믿으세요.
절교로 인한 절망이 아닌 함께함을 기대하며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