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는 가나안땅을 떠나 세일 땅에 정착했습니다.
이후로 세일은 에돔이라 불리게 됩니다.
에서가 가나안 땅을 떠난 이유는 가나안땅 헤브론이 쌍둥이 동생 야곱과 함께 거하기엔 비좁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장례 이전부터 이미 헤브론이나 브엘세바가 아닌 세일로 진출한 상태였었습니다.
세일 땅에서 장정 사백명을 이끌고 야곱에게 올만큼 에서는 세일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된 지 오래였습니다.
세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에서의 아내 중 오홀리바마가 세일산 호리 족속 출신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오홀리바마는 호리 족속 중에서도 광야 한가운데서 온천을 발견하고 확보한 것으로 유명한 ‘아나’의 가문 출신입니다.
세일 땅은 산지와 골짜기가 많은 지역이기에 에서는 중개무역과 상업을 생계로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강한 사병들이 필요합니다.
처가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에 에서는 낯선 땅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장자권을 빼앗기고 아버지의 축복조차 빼앗긴 에서는 평생 불쌍한 인생을 살게 될 것만 같았습니다.
40여 년 전 아버지 이삭 또한 에서에게 저주에 가까운 기도만을 물려주었습니다.
땅의 기름짐에서 먼 인생, 칼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이 에서의 인생이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런 아버지와 동생에게 보란 듯이 세일 땅에서 성공하여 잘 살아왔습니다.
야곱이 화해의 선물로 보내었던 가축들도 괜찮다며 사양할 정도로 에서는 부족한 것 없이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게다가 야곱으로부터 빼앗겼던 장자권과 축복 또한 돌려받게 됩니다.
이젠 모든 것이 정상화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장례 후에 에서는 돌려받은 장자권으로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을 겁니다.
거기에 야곱에게 선물로 받은 재산까지 더하고, 자신이 세일에서 이룬 업적까지 더하면,
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력가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에서의 인생은 우려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형통해지고 있었습니다. 

큰 부를 이룬 두 세력이 함께 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도 그랬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어디를 선택하든지 본인은 다른 땅으로 가겠노라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선택한 땅은 가나안땅을 벗어나는 경계지의 소알 땅 소돔이었습니다.
롯이 풍요와 안락함을 따라 가나안을 벗어나려 했듯,
에서도 자발적으로 가나안 땅을 벗어나 세일 산으로 돌아갈 결정을 했습니다.
세일 땅을 선택한다는 것은 칼을 믿고 살아가는 익숙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장자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임이 증명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으로부터 장자권과 축복을 돌려받은 사람다운 삶의 면모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장자로서 구속사의 혈통을 지키며 약속의 땅을 지키는 일 전부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넓습니다.
두 사람뿐 아니라 훗날 이스라엘 장정만으로도 60만 명 이상이 들어와 살게 될 거주지입니다.
두 사람의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가나안땅 안에서 충분히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가나안 땅 중에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은 것이 아니라 가나안땅을 떠나는 선택을 했습니다.
애초에 야곱은 에서에게서 장자권과 축복을 훔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에서는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벼이 여기고
자신의 힘을 믿고 살아갈 익숙한 세계를 향해 자발적으로 가나안땅을 떠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에서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야곱에게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겼을 때 그는 아버지 이삭에게 눈물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남은 복이라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복의 통로인 이삭에게만 매달렸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 힘든 순간, 억울한 순간에,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어 본적이 없습니다.
에서에게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 선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과 권리와 의무를 가벼이 여겼던 것은 하나님을 가벼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인, 롯, 이스마엘 등과 에서와의 차이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인생을 개척하며 하나님 없이도 사는 삶을 살아왔고
이제 다시 자신의 익숙한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삶,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왕이 되는 삶,
영원이 아닌 이생만 바라보며 사는 삶,
에서의 형통함에서 측은함이 보이는 이유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참 불쌍한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