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인들의 손에 팔린 요셉은 애굽으로 끌려가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손에 되팔리게 됩니다.
친위대장은 근위대장 혹은 경호실장에 가까운 직책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최측근으로서 권력에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의 집에는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이 따로 있을 정도로 대저택이었으니 관리하고 운영하는 하인들만 해도 엄청난 숫자였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종들 중에서도 요셉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특별한 옷을 입고 후계자로서의 특별한 관심과 교육을 받던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그 어떤 종들보다 탁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라헬을 닮은 준수한 외모에서 풍기는 귀티는 주인에게 특별한 호감과 주목을 받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형들에게 강제로 채색옷을 빼앗겼던 요셉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종이 되어 주인의 은혜를 입고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였는데 이는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보디발은 형통한 요셉 덕분에 큰 복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요셉의 행보를 두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고 말하며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것은 굴곡진 그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여 흥미진진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에서도 흔히 등장하지 않는 ‘형통한 사람’의 대표 격인 요셉의 성공 스토리 때문일 것입니다.
속된 말로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형통함의 비결을 엿보아 나도 요셉처럼 형통한 사람이 되고픈 열망 때문에 관심이 더욱 많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요셉의 이른바 ‘형통’이라는 것에는 의아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정말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형통한 사람이라면 왜 애초에 형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일까요?
노예의 신분이 된 것이 어떻게 형통함일 수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그리고 그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것을 형통이라고 부르기엔 적어도 요셉 입장에서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쓸모없는 형통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주인의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월급을 모아 자유를 사 독립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노예는 애초에 사유 재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종들에 비해서 조금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고 하여
무슨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평안과 안돈을 이룩한 형통함을 이룬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노예인 것에 비해선 그래도 꽤 잠을 푹 잘 수 있었다거나,
노예지만 밥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정도 수준의 삶을 두고 형통함이라 부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부러워하며 이룩하고 싶은 삶의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너무 초라하고 시시한 형통함 아니겠습니까.

혹시 이전엔 요셉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따름이 부족하여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지 않았었기에 인생이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이고,
이제는 고난 가운데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이제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으로써 그의 인생이 형통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표현은
요셉이 종이 된 순간뿐 아니라, 그의 인생이 그보다도 더욱 나락으로 떨어져
강간미수의 누명을 쓰고 죄수의 신분이 되어 감옥살이를 하기에 이르렀을 때, 그때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아마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형통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순간은 오랜 고난의 끝에 총리가 되었을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은 요셉이 총리가 되는 순간엔 정작 그 어떤 평가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요셉이 종이 되었을 때, 그리고 죄수가 되었을 때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즉 인생의 내리막길로 여겨지는 고난의 시간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에 겪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시작해서 그의 인생이 오르막길이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오르막뿐 아니라 밑바닥에서도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형통합니다.

형통함이란 장애물 없이 거침없이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형통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을 막힘없이 이끌어가셨다는 뜻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였듯,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듯,
하나님은 요셉을 강하게 주장하셔서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이끌어가심이 바로 형통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의 삶도 형통하게 됩니다.
인생의 오르막에서뿐 아니라 내리막으로 여겨지는 고난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형통한 삶, 당신을 향한 특별한 삶이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