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는 즉시 그 자리에서 해석하고 동시에 해결책까지 제시했습니다.
요셉의 풀이에 놀란 바로는 그 자리에서 요셉을 총리로 임명합니다.
요셉이 제시한 해결책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쉽게 말해줄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풍년 때에 1/5을 걷어 흉년의 시기를 버텨낸다는 계획은 듣기엔 쉬워 보이지만, 이는 결코 간단하고 단순한 계획이 아닙니다.
풍년 때에 저장할 곡식으로 1/2을 걷을지, 1/3을 걷을지, 1/5을 걷을지 분명한 수치로 제안할 수 있다는 것은
이집트의 일 년 예산과 흉년의 정확한 기간, 그리고 풍년의 정확한 규모를 모두 디테일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변수들까지 계산할 수 있어야 결정할 수 있는 수치입니다.
바로에게는 재무와 재정을 파악하는 인재는 정말 많았을 테지만,
이토록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는 인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치 한 달 전부터 이 문제를 미리 알고 밤새 연구하고 준비해온 석학처럼 그 자리에서 마스터 플랜을 제시한 것입니다.
요셉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계획을 실행하여 다가올 위기의 시간을 대비하도록 준비할 역량을 지닌 사람은 요셉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요셉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말이 정말인지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요셉의 능력이 공적 영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검증된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애굽왕 바로는 요셉을 총리에 임명했습니다.
빵관원장과 술관원장 같이 바로의 최측근이던 사람들까지 감옥에 다녀올 정도로 당시 애굽의 정치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애굽의 15대 왕조인 힉소스 왕조는 외세의 침략으로 세워진 왕조였기에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로 하여금 통치의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바로가 꿈에도 경계하던 국가적 위기가 실제로 눈앞에 닥쳐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로는 이 모든 것이 ‘신’이 자신을 돕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로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고 개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브낫바네아는 ‘하늘의 신 누트가 말해주어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하늘의 신 누트의 인도함을 받아 하늘을 가로질러 갑니다.
이와같이 요셉이 갈 바를 알지 못하던 바로의 길잡이와 구원자가 되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해결책은 바로의 가려운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주고 바로의 고민과 걱정의 문제를 모두 말끔히 사라지게 하는 해결책이었습니다.
이에 바로는 고민 없이 지체 없이 요셉을 총리의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요셉은 이른 아침 감옥에서 나올 때만 해도 죄수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최고급 세마포로 된 총리의 옷을 입고 있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오랜 시간 고생만 하다가 13년 만에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요?
자신을 감옥살이하게 만든 보디발의 아내를 불러다 공적으로 진실을 가려내길 원했을까요?
아니면 특공대를 가나안땅으로 파견해 13년 전 자신을 팔아먹었던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형들을 잡아와 복수하길 원했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지내고 있을 아버지를 찾아 아들의 생존과 출세를 알리고 성대한 행렬로써 애굽에 모셔오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위에 언급한 일들 중에 어떤 일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요셉은 총리가 되자 곧바로 애굽 전 지역을 돌며 순찰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총리의 세마포 옷이 요구하고 있는 책임감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이 급했습니다.
풍년과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저장창고와 시스템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사적인 복수에 시선을 돌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총리의 옷을 앞으로도 최소 14년간 입어야 했지만,
요셉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기대와 책임이 걸려있는 옷의 무게를 소홀히 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내가 이 옷을 왜 입고 있는 것인지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 목적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에게 총리의 옷이란 꿈의 실현이나 목적의 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요셉은 어떤 옷을 입든지 목적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과거의 일은 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의 이름은 잊었다는 뜻의 므낫세로 지었습니다.
요셉은 오직 위기를 이겨내고 생명을 살려내실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름은 창성하다는 뜻의 에브라임으로 지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과거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새 옷을 입혀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다가올 위기를 준비하도록 우리를 교회로 세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