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아들들은 시므온을 포로로 잡히고서야 애굽에서 곡식을 사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잡혀있는 시므온은 막냇동생 베냐민이 애굽으로 동행하여 내려올 때에야 확인 후 석방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애굽에서 계속 곡식을 거래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문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시므온의 생명뿐 아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에게 딸린 식속들 전부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아버지 야곱에게 부탁합니다.
르우벤은 ‘만에 하나 베냐민의 신변에 일이 생긴다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겠다’라고 말할 만큼 비장한 결심을 보여주었지만,
야곱의 마음은 확고했습니다.
야곱은 결코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 야곱은 유독 베냐민만 보내줄 수 없다고 고집하는 것일까요?
스파이 혐의로 애굽에 잡혀있는 시므온은 아들이 아닙니까?!
10명의 아들들과 그들에게 딸린 식솔들은 야곱의 가족과 후손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러나 야곱은 죽으면 죽었지, 베냐민을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베냐민을 향한 야곱의 사랑은 기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야곱의 베냐민 사랑은 건강하고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갈 때 베냐민은 끽해야 7~8살 정도였겠지만,
22년이 흐른 지금 베냐민은 30살 정도의 건장한 남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서른쯤의 베냐민을 대하는 태도는 6살짜리 아들을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합니다.
이때 베냐민은 이미 10명의 아들을 둔 가장이었습니다.
아들만 10명이니 딸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자녀를 두었을 것입니다.
베냐민이 나이 갓 서른에 10명이 넘는 자녀를 낳은 아비가 되었다는 점은 참 수상쩍습니다.
후손을 향한 야곱의 집착이 베냐민에게 얼마나 많은 압박으로 작용했을지 짐작하게 합니다.
야곱의 아들 사랑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일평생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라헬이었습니다.
정실부인으로서 레아를 인정했음과는 별개로 야곱의 평생 사랑은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은 30여 년 전 베냐민을 낳다가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었습니다.
큰 상심을 겪은 야곱은 남아있는 라헬의 흔적을 요셉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사랑이 상심을 겪자 편애가 된 것입니다.
이후 요셉마저 잃은 야곱은 남아있는 라헬의 마지막 아들 베냐민에게 더욱 마음을 쏟았습니다.
편애가 낙심을 겪자 집착이 된 것입니다.
베냐민을 향한 집착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상처 입은 야곱 자신을 위한 것일 뿐 베냐민을 위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삐침이고 원망의 항의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데려가시는’ 듯한 하나님께
‘베냐민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오와 결단을 행세하는 것입니다.
상처로 인한 반항심의 표출입니다.
집착의 실체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습니다.

원망과 집착에 사로잡힌 아버지에게 아들 유다가 나섭니다.
유다는 야곱에게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고 합니다.
담보는 히브리어로 교환한다는 뜻에서 온 단어입니다.
유다는 유사시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겠다고, 그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교환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설득에 야곱의 마음이 흔들리게 하셨습니다.
아들을 둘이나 잃어본 경험이 있는 아들,
그래서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아들,
남은 아들을 지켜보겠다고 애쓰는 마음이 무엇인지도 잘 아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대신하겠다는 또 다른 아들,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 아들의 희생에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놓기로 결정합니다.
아들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원망을 내려 놓게됩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통해 야곱의 마음을 공감하시고 마음의 날 선 무장을 해제시키십니다.
남아있는 아들들도 그의 아들임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함께한 식솔들도 존귀한 생명들임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들을 위해 생명처럼 여기던 베냐민을 보내기로 합니다. 

우리 마음에 깊은 절망과,
낙심으로 세워진 철옹성 같은 아집과,
하나님을 향한 끝 모를 원망,
방향을 모르는 체 터져 나오는 분노를 쉬게 하는 것은 오직 공감입니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내 맘 같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족이라고 다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진정으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야곱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주님은 아들을 잃어보셨습니다.
그분은 고난과 질고를 아는 분이시고,
깊은 절망과 좌절을 친히 겪어보신 분이시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세상은 못 하지만, 주님은 공감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채우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고 비워내시는 분이십니다.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