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시대의 문장가 유한준은 “알면 보이고, 보여야 느낀다”고 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의 수많은 지식 중에 어느 것을 어떻게 알아가는지는 사실 그의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될 것이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지요.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교수의 말대로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고전 건축양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기둥의 배흘림 양식이 보입니다.
같은 건축물을 보아도 누군가에게는 고택의 부동산 가치로만 보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겐 건축물의 역사적 의미가 보일지도 모릅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따라 보이는 세계는 달라집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진리를 아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세계의 진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와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구원하시어 통치하신다는 진리는,
그분의 그 크신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진리는 보아도 그만 안 보여도 그만인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면 그 끝은 절망뿐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요셉이 있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이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막냇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
형들이 돌아온 것을 본 요셉은 형제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애굽으로 불러와 거주하게 하시려면 요셉과의 화해와 화목이 필수였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용서에 합당하게 준비되었는지 진심을 확인하기에 앞서 함께 식사의 시간을 갖길 원했습니다.
혹시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가족 간의 식사 시간입니다.
형들의 마음이 이전과 다를 바 없음으로 확인된다면 요셉은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결과는 하나님만 아실 것이니 어쩌면 이 식사는 요셉으로선 최후의 만찬이 될지도 모를 식사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표출합니다.
22년 전엔 서로 간에 샬롬이라 말 할 수 없었던 형들에게 안부를 묻고 샬롬을 묻습니다.
형들의 자리도 나이순으로 앉게 합니다.
애굽인들이 숭상하는 소를 잡아 제사도 하고 먹기도 하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인들은 경멸하였기에 함께 식사하지 않는 법이지만,
요셉은 자신의 식탁에 있는 음식을 형들에게 건네주며 형들과 겸상합니다.
게다가 막냇동생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다섯 배나 많은 음식을 주어 사적인 친분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함께 식사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애굽의 총리로선 보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는 그가 애굽인이 아니라 히브리인이라는 시인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는 형제들에게는 이 모든 행동들과 대화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셉임을 알고 있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요셉의 모든 행동과 대사가 모두 이해됩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보다 더 깊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가 형제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의 진심을 확인할 시험을 앞두고 이토록 전심으로 형제들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냐민을 바라볼 때 그의 마음에서 복받쳐 올라온 사랑 말입니다.
요셉을 왈칵 눈물 쏟게 한 사랑인 ‘라함’은 어머니가 배 속의 아이에게 느끼는 긍휼과 연민의 사랑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사랑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도 그와 같은 결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살리시고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하셨는지, 요셉은 베냐민을 볼 때 가슴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해되지 않던 모든 것들이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여전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제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베풉니다.
요셉은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덮어 형제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알면 보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임을 알아보는 순간,
지나간 행동들과 대화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일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순간,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