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잃어버린 형제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은 애굽의 바로와 신하들은 모두 함께 기뻐합니다.
이집트뿐 아니라 근동 아시아 전체를 기근의 멸절에서 구해낸 영웅이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는 소식은 국가적인 기쁨이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말하여 형제들과 가나안 땅에 있는 가족들을 융숭히 대우하여 애굽으로 데리고 올 것을 명합니다.
바로는 형제들에게 세간살이를 아끼지 말라고 말합니다.
웬만한 건 애굽에 다 있으니 세간살이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그냥 몸만 속히 오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을 향하여 ‘애굽의 좋은 것이 다 너희의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통해,
선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과 세심하신 이끄심이 아름답게 열매 맺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이 속히 내려올 수 있도록 애굽의 수레를 가지고 올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오라고 전했습니다.
수레는 애굽의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입니다.
바퀴는 당시 최신 기술이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 한 획을 그은 대표적인 발명품이자 애굽 문화의 상징이며 국력의 상징입니다.
수레를 내어준다는 것은 야곱과 그 아들들이 상상 이상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요셉의 생존 소식을 믿지 못할 때에도 애굽에서 올라온 수레를 보고서는 요셉의 살아있음과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음을 믿을 정도입니다.
요셉은 가족들을 맞이하려 작은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준비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세심한 준비와 섭리의 은혜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가족들을 맞이하는 아들의 준비도 이러할진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준비하시는 세심함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지 헤아려볼수록 경이롭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가나안 땅으로 올려보내며 아버지 야곱에게 빈손으로 올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수나귀 열 필과 암나귀 열 필에,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왕복으로 오가는 동안 먹을 길양식뿐 아니라, 애굽의 아름다운 것들을 가득 실려 보냈습니다.
이는 선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며 애굽의 총리에게 가나안의 아름다운 것들을 선물로 준비하여 보냈던 야곱의 마음에 대한 화답입니다.
과연 기도의 응답으로서 태초 전부터 준비해오셨던 하나님의 이끌어주신 은혜를 전달하고자 함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형들을 아버지 야곱에게 보내며 요셉은 또 한 가지 세심한 부탁을 합니다.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 ‘다투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20여 년 전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을 상기시키며 그때 그 사건이 누구의 잘못이 가장 컸었는지 시시비비를 가리며 다투지 말라는 당부였을까요?
어쩌면 이전에 르우벤이 형제들에게 그런 식으로 타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하는 당부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원어를 직역하자면, 요셉의 부탁은 ‘다투지 말라’가 아니라 ‘떨지 말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큰 손해를 앞두고 원망과 억울함에 분노로 치를 떨며 다투어야 할 상황이라면 ‘다투지 말라’라고 번역해도 괜찮겠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본문의 상황은 억울함과 원망이 극한으로 치닫는 다툼의 상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올라가는 형제들에게 ‘가는 길에 떨지 말라’고 당부했다면, 그것은 형제들이 다툴까 봐 걱정함이 아니라,
형들이 요셉과의 만남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을뻔한 동생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완벽하게 은폐시킨 줄 알았던 범죄가 피해자의 생환으로 인해 모두 발각되게 생겼으니,
형제들에게 있어 요셉과의 만남은 당혹이나 곤란함을 넘어선 공포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요셉의 용서가 과연 진짜인지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지 의중을 다 믿기란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죄인들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아버지에게 요셉의 생존 소식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두렵습니다.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밝힌다면 아버지에게도 남은 가족들에게 고개를 들 면목이 없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 앞에 아들로서 또한 가족들 앞에 아버지로서 살아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형제들에게 떨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죄인들이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요셉은 담력을 넣어줍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요셉이 살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더라’고만 말합니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급한 마음에 당장을 모면하기 위한 수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부탁’대로 한 행동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악과 허물을 가려주고 덮어주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형들에게 옷을 선물할 때부터 이미 드러난 결심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자신의 채색옷을 벗기고 찢어서 아버지에게 거짓을 말했던 형들인데, 그런 그들에게 요셉은 새 옷을 선물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죽옷으로 가려주셨듯이 요셉은 형들의 수치를 덮어주려 합니다.
그 불법이 사하심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롬4:7,8).
요셉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셨던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죄인인 우리의 수치를 그리스도의 옷으로 덮어 가려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