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요셉이 상봉했던 해는 흉년이 아직 5년이나 남은 시기였습니다.
해가 갈수록 기근으로 인한 피해가 켜켜이 쌓여가고 피로감도 극심해지면서 이제는 생존 그 자체가 온 인류의 유일한 목표와 소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와중에 돈을 받고 양식을 판매합니다.
그리고 모여든 돈을 모두 중앙으로 모아들입니다.
애초에 요셉은 자금 순환이 아니라 자금의 완전한 회수만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가축과 땅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물론 그들에게서 가축을 모두 빼앗아 간 것은 아닙니다.
가축의 명의는 바로에게로 옮기게 되었지만, 사용권은 여전히 남겨주었습니다.
이는 가축이야말로 흉년 이후 사회에 정말로 필요해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축은 농사를 다시 시작하게 될 때에 최대한의 생산 효율을 만들어줄 농기계에 해당합니다.
요셉은 오랜 기근에 심신이 지친 백성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비관적으로 가축을 잡아 먹어버리기 전에 가축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확보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흉년 이후의 사회에 미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땅을 국가로 귀속시킨 것 또한 흉년 이후의 사회 안정화와 경제 공정성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위기의 시간,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언제나 고질적으로 빈부격차가 발생합니다.
만약 요셉이 무상으로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면 눈먼 재화와 남아도는 자금들은 극심한 빈부격차를 양산하는 데에 몰려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애굽은 극심한 격차사회가 될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흉년이 끝난 이후에 올 것입니다.
요셉은 토지의 소유권을 국가 귀속시킴으로써 고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저렴한 소작료를 책정해 백성들의 생계를 장려하여 경제 공정화를 이루었습니다.
요셉은 흉년의 시기뿐 아니라 이후 400년, 아니 몇천 년이 넘도록 유지될 국가의 초석을 다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정제도의 단점과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그에 비하면 민주주의는 탁월한 정치체제인 듯 칭송합니다.
그러나 왕정이든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중요한 건 시스템이 아닙니다.
요셉과 같은 탁월한 통치자 아래에선 온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국가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복이 됩니다.
왕정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누가 통치자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가 극악한 제도인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운영되었었고,
지금도 사회주의는 가정 안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부모의 것을 자녀가 사용합니다.
성공과 실패의 원인은 사랑으로 운영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누가 다스리느냐의 문제일 뿐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문제를 극복한 정치체제는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통치자로 선출되지 않도록 여과하는 기능은 민주주의에도 없습니다.
다만 잘못된 선출 결과를 수정할 기회를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얻을 수 있고,
그 시간이 도래하기까지 최대한 비판과 견제를 할 수 있는 제도라는 특징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특징은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선출된 사람뿐 아니라 선출하는 사람들조차 악하다는 문제 때문에 생깁니다.
악한 통치자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견제하여 악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듯,
탁월한 통치자 역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비판과 견제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최악을 발생시키지 않으려는 안전장치가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작용하여 최선 역시 결코 발생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니 민주주의 역시 우월하다 칭송하며 기대를 걸 수 있는 제도가 아닙니다.
최악은 없겠지만 최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누가 그 시스템을 운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치체제와 관계없이 선하고 의롭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완전한 자가 사랑으로 은혜로 지혜로 운영하여 다스릴 수만 있다면,
그 아래 속한 국민들은 평화와 화평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통치자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로 백성을 다스리시는 우리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그 왕 앞에 모든 것을 맡기면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왕정국가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녀 된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으로 아들 삼아주시는 진정한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족으로서 그의 사회주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노예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국민이 왕처럼 권력의 시작점이 되는 민주주의 사회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더욱 활동해야 할 곳입니다.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운영하느냐의 문제라면, 그 누군가는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그와 같은 지혜로,
성도를, 교회를, 공동체를, 세상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은 그분의 완전하신 통치 아래에서 그분을 닮아 왕노릇하며 세상을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누가 섬길 것인가?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