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축복으로 잘 알려진 창세기 49장엔 임종 직전의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시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쌍의 유의어를 반복적으로 변주하여, 누적된 시어들을 대비시켜 운율을 쌓아 올립니다.
야곱의 유언이 시 형식으로 기록된 이유는 그만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어 하나하나까지 정확하게 암기해야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은 자신의 유언이 후대에까지 대대로 암기되어 전해지게 할 목적으로써 시 형식을 빌려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유언은 야곱의 아들들 당대에 대한 축복과 예언뿐 아니라 후대를 위한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 야곱의 유언이 아들들의 일생에만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이라면 굳이 이렇게 시 형식으로 계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는 훗날에 있을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훗날’이란 히브리어로 ‘마지막 날’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노래는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종말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기록 목적이 달성될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와 같은 아들들의 개인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것은 성경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적이 아닙니다.
아들들의 개인사와 그 후손들로서 세워지게 될 지파들의 역사는 훗날에 있을 일들에 대한 예표로서 교보재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됩니다.
다시말해 르우벤과 레위와 시므온과 같은 아들들에게서 일어날 일들은 사실 우리와 같이 마지막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르우벤이 우리이고, 우리가 레위와 시므온입니다.
탁월한 듯 탁월하지 못했던 르우벤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르우벤을 가리켜 물의 끓음 같이 탁월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물의 끓음이란 끓어오르기 직전까지 잘 모르는 법입니다.
직접 손을 넣어보는 것이 아니면 얼마나 끓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겉보기엔 그저 잠잠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물의 온도가 일정 온도에 도달하게 되면 그 순간 갑자기 기포를 꿀렁이며 폭발하듯 끓어오릅니다.
그러고는 흘러넘쳐 가스 불을 꺼버리기 일쑤입니다.
우리의 죄성이 딱 그렇습니다.
선을 넘습니다.
평소엔 잠잠하고 평온하고 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일정 조건이 갖춰지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폭발처럼 끓어오릅니다.
그러고는 그릇에서 흘러넘쳐 자기 위치를 벗어나며 질서를 벗어나고 맙니다.
때로는 너무나 격렬하게 끓어올라 도덕과 윤리, 염치를 벗어나 버리기도 합니다.
‘나는 괜찮겠지’하고 자신하던 사람이라도 언제 어떻게 끓어올라 맡은 자리와 임무를 이탈하게 될지 모릅니다.
나조차도 나를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성입니다.
르우벤과 레위, 시므온의 죄성은 온 인류의 죄성의 본질을 잘 요약해 보여줍니다.
르우벤은 서모 곧 야곱의 아내인 빌하를 범함으로써 야곱에게서 아내를 빼앗아버렸습니다.
이는 야곱이 가진 남편의 권리를 파괴한 것입니다.
레위와 시므온은 여동생 곧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자신들이 가장인 양 나서서 결혼을 빌미로 세겜성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야곱은 분명 평화로운 결혼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레위와 시므온은 야곱이 가진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인정치 않고 묵살하며 스스로 가장인 듯 나섰습니다.
이로써 야곱은 그들에게서 더 이상 아버지로서 설 자리를 잃고 말았고
그들의 폭력은 세겜성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야곱에게도 가혹한 것이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라는 이미지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유비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 두 비유를 구축해왔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아들들은 하나같이 이 두 모습을 부정하고 파괴시켰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남편이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아 장자의 자격을 이어갈 수 없는 이들이란
물의 끓음 같이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을 아버지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남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그들의 결국은 흩어짐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야곱의 이런 유언을 축복이라고 평가합니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해결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왕에 대한 예언에서 드러납니다.
유다의 후손에서 다윗왕이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진정한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시면 흩어짐의 저주 아래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에게도 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받게 될 사람들의 목록에 르우벤과 레위와 시므온도 포함되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한다면 우리는 모두 흩어져 사라져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약속의 왕이 오시면 하나님은 우릴 레위처럼 하나님 소유로 삼으실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약속의 왕이 흩어진 우리 삶에 찾아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