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을 들려주며,
진정한 복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소망을 유산으로 남기고 임종했습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저주 같던 야곱의 유언은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이 예언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복’이 먼 미래에나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이루어진 복임을 야곱의 임종을 통해 묘사합니다.

모세는 야곱의 마지막을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망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야곱이 그 백성에게로 돌아갔다’고 표현합니다.
한국어로 ‘돌아갔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싸프’는 원래 모은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직역하자면 ‘야곱은 그의 백성으로 모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장례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례 문화는 일단 동굴에 시신을 안치하고 훗날 뼈만 남게 되었을 때
그 뼈를 수습하여 가족들의 뼈가 안치된 안쪽 굴에 다시 안장하는 방식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됩니다.
이때 그 뼈가 가족들의 뼈에, 조상들의 뼈에 함께 하도록 모아지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 ‘모아졌다’인 것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열조에게 돌아갔다, 백성에게 돌아갔다’는 표현은 그런 뜻이지요.
훗날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당신과 함께 묻히겠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뼈를 함께 모아 안장하는 이러한 장례 문화를 가리킴입니다.
성경은 야곱의 죽음을 사망이 아니라 백성에게로 모아졌다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야곱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그 복을 얻은 사람들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즉 야곱이 예언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그 복이 야곱에게 있으므로 야곱은 이미 마지막 날의 그 복 안에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죽음 또한 그렇습니다.
즉 이 복을 유업으로 상속받은 사람들인 우리의 죽음은 사망으로서의 ‘끝’이 아니라,
모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그 은혜에 합류하게 되는 ‘계속’인 것입니다.
끝이 아니라 합류입니다.
END가 아니라 AND 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그 복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 시대와 공간을 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이 복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 복이야말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에서 끊임없이 ‘주겠다’ 약속하셨던 복의 실체인 것입니다.

야곱은 풍요롭고 안락한 애굽에서의 삶에 이 소망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애굽에 뼈를 묻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땅에 묻히길 원했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묻히길 원했던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서 구매한 막벨라 굴’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모으시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새 터전에 대한 기대로서 지불한
일종의 보증금과 예약금 같은 곳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복 주신다’는 이 언약에 뼈를 묻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가나안땅은 언약의 소망이 있기에 더욱이 그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대로 야곱을 가나안땅 막벨라 굴에 장사합니다.
가는 길이 멀기 때문인지,
혹은 아버지의 뼈를 수습하여 다시 안장하는 과정을 본인이 할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인지,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에 향 처리를 합니다.
40일간 향 처리를 했다는 것은 시신을 쉽게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에 먼저 묻혀서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요셉은 자신의 임종 이후 자기 시신을 아버지가 기다리는 그 땅으로 들고 가줄 것을 형제들에게 부탁합니다.
다시 한번 부자 상봉의 기쁨이 재연되기를 요셉도 소망으로 기다리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질 날을 기다리며,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함께 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장례는 애굽에서의 삶은 나그네요 거류민의 삶임을 우리로 기억하게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떤 이들은 삶의 안락함에 이 소망을 잊어버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인생의 고단함에 이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소망이야말로 우리가 뿌리내리고 뼈를 묻어야 할 진정한 본향인 것입니다.
고향 땅 본향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나고 자란 곳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의로움과 은혜와 거룩함 가운데서 태어난 것이 아닌
거짓과 저주와 사망 권세 아래에서 태어난 우리도 감히 그곳을 본향이요 고향이라고 부르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사실 고향이 고향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장소와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곳,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기다리는 곳이 고향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기다리는 곳,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모아주시는 바로 그 소망의 예수가 있기에
그분의 나라는 우리의 본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