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0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야곱의 장례와 요셉의 장례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장례는 ‘애굽에서의 삶은 나그네요 거류민의 삶’임을 우리로 기억하게 합니다.
출애굽기로 이어질 END가 아닌 AND의 이야기는
모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아 그 은혜에 합류하게 될 날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가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의 주제이자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창세기의 진정한 엔딩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와 요셉의 장례 사이에 다뤄지고 있는 용서의 이야기는
문예적인 강조로 보았을 때 창세기라는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마침표 역할을 합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모습은 바로 ‘용서’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자, 동생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야곱이 생전에 남겼다는 말을 전달합니다.
그것은 ‘형들을 용서해주라’는 야곱의 또 다른 유언이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말을 야곱은 생전이 아니라 사후에 전하게 한 것입니다.
생전에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을 불러다 놓고 가운데에서 서로 악수시키고 포옹시키고 해코지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게 하는 일을 하진 않았습니다.
야곱은 전적으로 용서를 요셉의 것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이제 아버지도 없으니 요셉에게 ‘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 하는 부담이란 없습니다.
용서는 전적으로 요셉의 것입니다.
십수 년 전 형제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올 때도 이미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하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서로가 이 문제를 꺼내놓고 수면 위에서 다루어 정리한 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로 간의 이해가 있었겠지만 이러한 관계의 잘잘못에는 마침표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셉은 평생을 따라다녔던 상처에서 진정으로 놓임을 받는 해방감에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을 향한 용서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세 가지로 자신을 정리하여 용서를 말합니다.
첫째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시작에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 하는 사람의 범죄함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발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창세기의 마지막에선 하나님 자리를 대신 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의 결정과 다스림이라는 질서 안에 순종하는 진정한 겸손으로서 파괴된 관계가 회복됨을 말합니다.

둘째는 당신들의 악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과 섭리 안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는 믿음의 선포입니다.
이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파괴할 수 없기에 당신들의 악행조차 나를 침몰시킬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즉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일이기에 무엇도 나를 해칠 수 없다는 인생에 대한 강한 자신감입니다.
진정한 겸손과 진정한 자신감은 우리 안에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고 성숙하게 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요셉이 말한 세 번째 말로써 드러납니다.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겠다는 요셉의 선언은 악을 선으로 갚겠다는 용서의 절정과 같은 모습입니다.
진정한 겸손과 진정한 자신감이 만나 진정한 성숙을 이루면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악을 선으로 갚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그건 그냥 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악에 남겨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악을 선으로 갚게 만드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용서 말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 자리에 서지 않는 겸손함으로,
그 누구의 악행도 나를 침몰시킬 수 없다는 자신감으로,
우리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
악을 선으로 갚으며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