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곧 성경의 예언대로 모두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
그에 관한 모든 지식을 근원부터 차례대로 기록하겠다고 밝힌 누가는 이제 그 ‘근원’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가 천사에 의해 세례 요한의 출생을 고지받는 이 장면을 ‘이루어진 사실의 근원’으로 여기고 기록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장면은 말라기 선지자의 마지막 예언 이후 400년간 이어져 온 하나님의 완벽한 침묵을 뚫고 재개된 하나님의 계시였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하나님은 그 어떤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고 그 어떤 천사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침묵이었습니다.
400년 전 선지자 말라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말라기의 예언은 하나님의 완전한 침묵 속에 보란 듯이 400년이란 시간 동안 지켜지지 못한 약속으로 남아버렸습니다.
동시에 구약에서 약속한 모든 예언들도 그냥 해프닝처럼 그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완전한 침묵을 깨트리고 사가랴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수많은 에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그 말씀을 실행하시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활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을 기다리듯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오랜 침묵 속에서 약속한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민족의 이러한 간절한 소원과 간구를 마음에 품고 성소 안에서 분향하던 사가랴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성소 안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낳게 될 아들에 대해 ‘요한’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천사는
요한이 ‘아버지들의 마음들을 아들들의 마음들로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아버지들의 마음들을 아들들의 마음들로 돌이키게 하겠다는 것은 400년 전 말라기 선지자의 마지막 예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400년 전의 그 약속들을 잊지 않으셨고 이제 그 약속을 상기시켜 성취하실 계획이심을 선언하심과 같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아버지들의 마음들을 돌이키게 하겠다’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여기에 ‘거스르는 자들을 의인들의 슬기에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설명을 추가합니다.
이는 ‘돌이키게 할 것이라는 아버지들의 마음들’과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거스르는 자들’을 일치시켜 비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사가랴의 시대, 세례 요한과 예수님 시대의 아버지들, 곧 조상들의 마음이란
하나님을 거스르며 불신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조상들의 역사는 더 이상 믿음과 영광의 시대가 아니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오욕의 역사였고,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울부짖으면서도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패역한 마음으로 살아온 불신의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400년 만에 이어받게 된 사가랴조차
그런 아버지들의 마음, 거스르는 자들이 보여온 불신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될 것이라는 이 기쁜 소식을 불신했습니다.
사가랴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고 천사에게 반문합니다.
이미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노부부의 현실 안에서 사가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심합니다.
100세가 넘어 이삭을 낳았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사가랴에겐 그저 신화와 전설일 뿐 현실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사가랴는 아버지들의 마음, 거스르는 자의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는 불신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가랴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조상들의 마음처럼 거스르는 자들을 의인의 슬기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이행은 첫 번째로 사가랴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사가랴를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불신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답답함과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의 죄악을 돌아보게 만들고 회심하게 하며
자신의 본성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들고 진정한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시선을 교정하여
거룩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고대하며 기다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의 등장까지 계속되었던 400년의 침묵은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민족의 거대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야곱과 요셉 이후 모세의 등장까지 계속되었던 400년의 침묵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간절한 열망이 되었습니다.
요한을 낳기까지 사가랴의 40주 침묵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하여 기쁨으로 기다리게 만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시작될 때 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증거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소망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은 침묵까지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