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의 침묵을 깨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세례 요한이 태어날 것을 계시하셨던 하나님은
6개월 만에 가브리엘 천사를 다시 한번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번에 천사 가브리엘이 찾은 사람은 다윗의 자손 요셉의 정혼자인 동정녀 마리아였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평안을 물으며 인사합니다.
‘샬롬, 은혜를 받은 이여’라는 뜻의 누가복음의 이 인사 장면을 라틴어 성경은 ‘아베 그라띠아 플레나’라고 번역합니다.
줄여서 ‘아베 마리아’입니다.
평강을 묻는 그의 인사말과는 다르게 천사가 전한 내용은 놀라 자빠질 만큼 파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임신할 것이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일 년 후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셉과의 결혼을 서두른다면 몇 개월 안에도 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천사의 전갈은 마리아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바로 지금 그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고지함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혼 기간 동안 신랑과 신부는 동침할 수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정혼 기간에 임신한다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비 신랑인 요셉의 반응이 어떠할지 더욱 걱정입니다.
사생아를 낳은 부정한 여자의 인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요셉의 반응에 따라 자칫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천사는 ‘평강’을 언급하며 담담하게 ‘임신’을 말한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의 방식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계획의 목적과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낳게 될 아들 ‘예수’는 완전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체화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를 고대하고 기다린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급진적인 계획이었습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시겠다는 계획이라니!
천사의 전갈은 하나부터 열까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습니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하고 타락한 이 땅에 내재하여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로 낮아지실 것이라는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로선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불경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점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안에서 복음을 거부하는 마음의 장벽보다 훨씬 크고 치명적인 장벽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마음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고지를 아멘으로 받기로 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다.”
그것은 마리아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뜨거워진 감정을 앞세워 내린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아베 마리아’ 인사를 듣는 그 순간부터 치열하게 사고했습니다.
성경에 마리아가 어찌 된 일인지 생각했다고 표현하는 장면에 사용된 단어 ‘디알로기조마이’라는 헬라어는 지독히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활동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재고를 확인하거나 회계 장부를 작성하거나 물건의 무게를 재는 상황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수치화하고 측량하고 계산하는 이성적 활동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그의 이성과 지성과 감성을 총동원하여 사고하고 비평하여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리아는 천사에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 것인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6개월 전의 사가랴도 천사에게 질문을 했었으나 사가랴의 질문은 믿음 없음이란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마리아에게 어떻게 그 계획이 수행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줍니다.
그녀의 질문은 불신의 의심이 아니라 신앙의 설명을 향한 갈구였던 것입니다.
질문에는 두 종류의 질문이 있습니다.
진실과 진리를 알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고, 진실에 눈감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자칫하여 모르고 싶던 진실과 진리를 대면하게 될까 봐,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까 봐,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던 생활과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질문함으로써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이 죄인들의 마음입니다.
진리와 진실에 눈을 떠 새로운 방향으로 인생이 이끌려 나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감히 마음을 열어 사고하고 비평하고 질문함으로써 진실을 알아 진리에 대면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전능자의 그늘이 우리를 덮으시면,
성령은 우리에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갈 마음의 담력과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마음의 장벽을 부수고 깨어내고 전진할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불확실하고 심지어 고난과 손해가 가시밭길처럼 놓여있는 길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용기와 지혜로 충만한 사람은 인생의 주도권과 핸들을 주께 맡기고 그 길을 따라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에게 용기로 진리를 마주하게 하시는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