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위인들의 어렸을 적 모습을 궁금해합니다.
특별한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영웅들과 위인들의 비화에서 그 인물의 연소함으로도 가려질 수 없는 비범한 일화를 기대하게 됩니다.
모든 중요한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거의 예외 없이 특별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유년 시절의 특별한 이야기는 그 인물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 시절마저 이렇게 특별하다면 성숙하고 완숙해진 후의 진가는 얼마나 더 대단할 것인지’ 기대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종교성을 자극하여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눈 씻고 찾아봐야 찾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어린 예수가 부모와 떨어져 실종될 뻔했던 사건만이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을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성경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는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와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듣기로 한다면 마리아를 포함해 얼마든지 채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과장이나 신화적인 일들을 꾸며냄이 아닌 사실만을 기록해야 하는 성경 기자들에게 있어
메시야의 어린 시절이란 특별할 게 없는 평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마리아의 기억 속에서 소년 예수가 유일하게 평범하지 않았던 사건이 있다면 바로
12살 되던 해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유월절 날 실종 사건입니다.
물론 그조차도 기적과 같은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날의 마리아는 예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살 소년 예수는 13살에 있을 성인식을 딱 일 년 앞두고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밀착 교육을 받는 중이었습니다.
12살의 소년들은 아버지로부터 인생과 가치관과 생계와 율법과 영적인 영역에까지 필요한 모든 부분에 멘토링을 받았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동안 예수는 요셉으로부터 평소보다 깊은 가르침을 받으며 아버지와 함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요셉은 없어진 예수가 엄마와 돌아가는 중이라 생각했고,
마리아는 예수가 아빠와 멘토링 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예수는 성전에 남아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데까지는 한두 시간도 아니고 무려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소년 예수는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부모에 대한 걱정 하나 없이 율법 교사들 사이에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실수로 길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고 부모의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율법교사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한 모습은
마리아의 기억에 남을 만한 예수의 일탈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는 잘못을 질책하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왜 찾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는 소년 예수의 대답은,
‘아버지 곁에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책망하는 마리아에게 ‘이미 그러고 있지 않느냐’고 반응한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와 언제나 함께해야 하는 12살 소년의 의무대로 자신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하는 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밝혀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언제부터 자신이 100% 사람이자 100%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아무리 신성이 인성을 연합하신 존재라 하더라도
인성의 지혜가 신성의 지혜를 다 담을 수 없다면 인성은 신성의 깊은 것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가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지혜가 자라고 사랑스럽게 성장하였노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식을 앞둔 예수는 자신의 깊고 고결한 정체성을 분명히 알만큼 성장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존재인 걸 아셨습니다.
순종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물이 자신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엄청난 위엄의 존재임을 알았으니 이제라도 그에 걸맞게 살 수 있습니다.
존재에 합당하게 대우받으시려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며 순종의 의무를 가진 존재가 아님을 선언하시고 나서,
놀랍게도 예수님은 마리와 요셉을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가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셨습니다.
크신 위엄의 선포와, 그렇지 않은 그의 겸손한 순종은 마리아에게 이날의 사건을 마음속에 각인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아셨으니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예수는 사람에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예수는 율법 아래에 순종하셨습니다.
본인으로선 외면당하고 거절당하고 버림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그래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의 순종은 지혜와 함께 성장한 그의 자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처럼 우리도 지혜와 사랑으로 순종함에 성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