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한 세례 요한은 요단강가에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는 구약에서는 등장한 적 없는 예식이지만 그렇다고 세례 요한이 처음 고안하고 베푼 예식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없없지만,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세례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에 받게 되던 예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며 애굽을 떠났고 요단강을 건너며 가나안땅에 들어왔던 그들의 역사를 따라,
요르단 광야 쪽에서 요단강으로 들어가 온몸을 씻은 후 가나안땅 쪽으로 나옴으로써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개종의 예식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대다수 유대인에게는 자신들을 상대로 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란 불쾌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그들에게 개종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례 요한은 이 세례의 의미를 ‘죄사함을 얻기 위해 돌이키는 회개의 세례’라고 선포했습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따라 자신들의 의로움과 복락은 빼앗길 수 없는 불변의 것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그가 베푸는 세례는 대다수 유대인에게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은 그런 유대인들을 상대로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러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독사의 자식이란 하나님의 원수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발심과 불쾌함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나요?
불편함 정도가 아닌 분노를 느껴야 정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해 광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하여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광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맞습니다. 우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이제 돌이키길 원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입니다.
화가 난 군중들에 의해 공격받게 될 것만 같았는데 군중들은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엇이 그들로하여금 불쾌함과 불편함, 수치심과 분노를 넘어서 광야의 선지자에게까지 나아오게 하였을까요?
세례 요한은 몰려든 사람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비꼬아 책망하는 듯한 뉘앙스로 느껴지지만,
사실 요한은 비꼬거나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누가 너희를 이곳까지 이끌었느냐?” 하는 뜻입니다.
생각해 볼수록 놀라운 일입니다.
인생에서 드러나는 가장 작은 죄악 한가지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돌이켜 온전한 순종을 시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덧셈을 못 하는 학생이 미적분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황당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의로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이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그를 따르고 믿고 사랑하기며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자신의 본성으로선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들의 죄를 자복하게 하고 돌이키게 하여 요단강가의 선지자에게로 불러낸 것일까요?
그분은 우리 가운데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빌1:6).
성령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시고 인정하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폭로되는 죄악을 숨기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지난날을 슬퍼하고 돌이키려 합니다.
세례 요한이 질문으로서 확인시키고자 한 것은
세례란 ‘너희의 본성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결코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라고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한 본성과 죄악을 회피하게 하거나 은폐하게 하거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악을 인정하게 하시고 거기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없다면 성령의 이끄심을 받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이지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는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회개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는 포도가 열리고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가 열립니다.
삶에 회개의 열매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