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가의 광야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세례 요한의 등장 소식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4백 년 전이면 정조 시대입니다.
그만큼 400년이란 시간은 정말 긴 시간입니다.
선지자의 활동이 전설처럼 느껴질 만한 시차입니다.
그런데 400년 만의 침묵을 뚫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셨으니,
세례 요한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약 없을 것만 같던 메시야를 향한 약속도 언젠가 성취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세례 요한을 향한 뜨거운 인기와 함께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무도 대놓고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시냐고 확인하여 묻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그러한 기대와 존경이 잔뜩 담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에 불과했습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자, 사람들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던 중국의 고사처럼,
사람들은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야를 가리키러 온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처럼 주목하려 했습니다.
이 눈치를 세례 요한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처음부터, 자신이 아니라 이후에 등장하실 진정한 메시야를 드러내고 주목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선지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뚜렷하고 명확한 이해가 있었기에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방향 잃은 염원에 대해 더운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자신은 절대 메시야가 아니라고 사람들의 기대에 대답합니다.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실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이시라고 메시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고 그럴 깜냥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언급한 불과 성령이란 어떤 방식의 세례를 말하는 것일까요?
세례 요한은 설명 없이 신비로운 이미지로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하게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께서 불로써 타작마당을 청소하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타작마당에서 도리깨질과 키질이 끝나고 난 뒤 마당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가라지들을 모아 불에 태워 청소하듯
하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고 심판하실 것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꽃 같은 진노가 모든 죄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의 심판 말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함께 아담 안에서 아담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사망에 던져진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인간은 선을 행하지도 의로움을 원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본성대로라면 악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니 선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서게 된다면
한 사람도 에외 없이 하나님의 불꽃 같은 진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신다는 그리스도가, 메시야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정으로 구원하실 분이시라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불태우는 듯한 정의의 심판을 해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불같이 행하시는 진노의 심판을 감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기대에 취해 잠시라도 우쭐할 만도 했지만
절대 그리스도가 되어볼 상상조차 해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 그 누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오롯이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구원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디까지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나는 그리스도가 하실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노라고 외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던 것과는 다르게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그의 신발끈을 풀어볼 생각은 도저히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높아 보이는 자리를 권합니다.
그리스도가 되어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되어보라고 합니다.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보라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부추깁니다.
때로는 기대와 존경의 눈빛을 보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이가 자리만 탐할 때 심판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와 심판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그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자리에선 정의의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는 쉽고 가볍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면 진노의 하나님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