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가의 광야에서 사역하던 선지자 요한은 그간 다소 거친 언행으로 사역을 해왔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런 언행을 한 것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게 하고
돌이켜 자신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며 마주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인기를 위해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거친 가르침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 곁에 남을 사람들을 만들고자 함도 아니요, 내 편을 만들고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은 가려지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그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찾아온 사람들에겐 충분히 기분 나쁜 지적들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찾아와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온 것은 그들의 본성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 돌이키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요한이 그토록 그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분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성령은 사람들을 광야로 불러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요한에게 가르침을 받고 줄을 서 세례를 받는 중이었지만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군중 속에 섞여만 있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세례를 받고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음성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과 소리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함께 들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실관계만을 기록하겠다고 선언한 누가가 직접 인터뷰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복음서를 써 내려갈 때,
그리스도의 세례 장면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 강림의 광경은 아마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등장해 자신의 아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인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의 강림이 구태여 필요치 않으신 분이셨지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은 비둘기의 모습으로 예수님께 내리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하시는 상징이라면 왜 하필 비둘기여야 했을까요?
훗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재하실 때와 같이 타는 불 모양으로 임재하시지 않고 비둘기의 모습으로 임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임하신 것이었습니다.
세례란 물을 지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모습이나 요단강을 건너는 모습을 세례로 비유하곤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세례를 의미하는 또 하나의 상징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바로 노아 시절의 홍수입니다(벧전3:20,21).
홍수 때에 모든 죄인들은 물속에 던져져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노아와 그 가족들은 그들을 대신하여 홍수에 던져진 방주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방주를 땅을 대신해 임시 거처로 삼던 노아와 가족들은 훗날 물이 빠지기 시작할 때 마른 땅이 드러나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이때 비둘기는 마른 땅이 드러났음을, 인간이 살아갈 지면이 드러났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창8:11).
즉 세례 때에 비둘기가 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새 땅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약속의 땅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얻게 된 가나안 땅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홍수와 같은 사망을 물러가게 하고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갈 마른 땅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터전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위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이러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을 반석 삼아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가 진정 주의 몸 된 성전이고 교회라면 우리는 이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시작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를 반석으로 삼아 그 위에 인생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위에 강림하시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땅을 제시해 주신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임재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신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따라간다면,
그분은 우리가 살아야 할 새터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기쁨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