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며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루다가 급작스럽게 족보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족보가 등장하는 타이밍도 독특하지만,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족보 자체도 참 독특합니다.
마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족보와는 달리 누가복음에는 생소한 이름들이 가득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로서 정당한 왕위 계승자의 등장을 선포하기 위한 법정적 의미의 족보였다면,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로서 실제적인 혈통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의 족보는 그의 인격과 인성을 강조하는 족보입니다.
또한 동시에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도 함께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상향식 족보가 쓰였습니다.
일반적인 족보들이 위에서부터 아래 세대를 향하여 기록하는 하향식 족보인 것에 반해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래에서부터 윗세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향식 족보입니다.
하향식 족보는 그래서 결국 그 끝에 누가 등장하는지 구체적인 한 인물에 집중하게 하여 주인공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면,
상향식 족보는 그 반대로 기원을 찾아 올라가 이 모든 일의 시작에 관심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누구인지 누가의 족보가 주목하게 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에게서부터 거슬러 올라간 족보는 아담에 이르고 하나님에까지 이릅니다.
성경의 족보들 중에서 유일하게 누가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족보에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누가가 이 점을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신 그분이 구원의 정점에서 직접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검산하듯이, 검증하듯이, 증명하듯이 족보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누가복음의 족보와 마태복음의 족보 사이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소개하며 아브라함에서부터 족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거쳐 아담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족보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구체적 민족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인류는 모두 아담에게서부터 출발하였다는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의 족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느 한 민족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담의 자손인 보편적 인류에게 열려있는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등장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은,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이 유효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누가는 이방인인 데오빌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은 데오빌로와 상관없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데오빌로마저도 포함하는 사건이라는 점을 족보로 기술한 것입니다.

족보를 기록하기에 앞서 누가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먼저 자세히 다루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지 말라’고 가르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기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영원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민족적 베타성이 아닌 복음의 보편성은 영적인 기득권 세력의 자부심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목적과, 그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는 누가의 목적도 사람들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스러뜨리는 데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누가가 가르치고자 한 것은 새로운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소속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기에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되었음을 누가는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믿게 된 사람들’ 그래서 ‘구원 얻은 사람들’이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이 공통점이 되어 우리는 새로운 나라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을 얻게 됩니다.
데오빌로는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지만, 누가와 데오빌로는 아담의 후손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런 데오빌로에게 이 새로운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과 소속감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단결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피부색? 같은 피라는 민족적 혈통?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지역색?
비슷한 가정환경? 비슷한 소득 수준과 경제규모?  자녀들의 비슷한 연령대? 비슷한 성격과 기질?
그러나 그런 공통점들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의 소속으로 모으는 공통적인 정체성은 오직
말씀이신 하나님,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자녀라는 부르심 뿐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족보를 뒤집어 가면서까지 예수님을 설명하며 그 소속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죄인과 화목하게 행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