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시고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유대 광야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40일 전 요단강에서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퍼져나간 그에 대한 소문은
이제 유대 지역을 넘어 갈릴리 지역까지 빠르게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는 소문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오는 길목마다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해 회당에서 설교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가르치심이 계속될수록 예수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30년 가까이 자라온 고향 마을 나사렛에 도착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은 평소처럼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나사렛 회당은 예수께서 30세가 될 때까지 안식일마다 예배에 참석했던 곳입니다.
때문에 모여있는 사람들 모두가 익숙한 얼굴들입니다.
장소도 사람들도 모두 친숙한데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은 예수님이 청중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계신다는 점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지금껏 예수의 비범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지내며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평범했던 청년이
어떻게 갑자기 온 민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선지자이자 강력한 메시야 후보(?)가 되어 돌아왔는지 의아하고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두루마리로 된 커다란 양피지 성경을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셨을 때
모든 사람들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조용히 예수를 쳐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본문은 이사야 61장 1, 2절이었습니다.
원래 회당에선 절기력에 따라 정해진 본문 순서에 맞추어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 본문은 예수께서 일부러 선택하신 본문은 아니었습니다.
그 주에 다루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던 본문을 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공교롭게도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년의 약속을 노래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희년이란,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도록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구원자가 되어주시는 때를 말합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노예가 해방되고, 토지가 원래 주인에게 반환되며, 모든 부채가 탕감됩니다.
기대감에 가득 차 예수를 쳐다보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침묵을 깨어내며 짧고 간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다.” 
예수님은 희년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희년임을, 구원자이심을, 메시야이심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이에 회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예수의 은혜로운 말씀에 모두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작 놀라운 일은 따로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때까진 아무도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쾌하게 여긴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화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은혜롭게 여기고, 놀라워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고향 사람들은 마음이 설렜습니다.
자신을 구원자, 메시야라고 선언한 청년이 바로 우리 마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옆집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선언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마을의 큰 경사입니다.
고향에 베풀어질 혜택은 엄청날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떨어질 콩고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만난 기분으로 그들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며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 말은 ‘나는 구원하러 왔지만, 너희에게 온 것은 아니니, 너희의 환영을 받지 않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던 고향 사람들은
배신감과 모멸감에 평생을 보아왔던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죽이려 합니다.
이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기대와 달라서, 욕심이 실패해서, 죄성이 폭로되어서 그들은 이웃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이 읽으셨던 이사야서 말씀대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나사렛의 사람들은 전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이 부유한 동네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내세울 것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베푸실 혜택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향이라서, 출신이 같아서, 친분이 있어서 기대함이 당연했습니다.
의사가 다른 이들을 치료하기에 앞서 자신의 건강부터 챙겨야 하듯,
고향부터, 이웃부터, 오래 알고 지낸 지인부터 한자리씩 한몫씩 챙겨주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겐 친분으로써 내세울 권리와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만을 위해 오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처럼,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장군처럼,
이방인이라서 내세울 자격도 없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어떤 능력도 없는,
그래서 그 어떤 소망도 없이, 염치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자들을 위해 주님은 오셨습니다.
자격이 없는 그래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태생이나 친분이나 공로가 아니라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
자격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