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땅 나사렛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40킬로 떨어진 가버나움이란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질 희년의 소식’이 되시기 위해 가르치시는 사역을 계속해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가 한창이던 그 순간 회당에 앉아있는 사람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말씀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그는 바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외치곤 예수님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참으로 의아한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 앞에서 꾸짖음을 듣고 쫓겨날 것이 자명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애초에 예수의 행보와는 반대되는 길로 도망가야 했을 귀신 들린 자가
오히려 예수님이 계시는 회당에 들어와 먼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회당에 모여있는 예배자들 중에 귀신 들린 자가 섞여 있음을 모르실 리 없었음에도
귀신을 드러내어 쫓아내지 않으신 체 귀신을 무시하듯 말씀만을 전하셨는데,
그러자 상대해 주지 않는 예수 앞에서 귀신은 자진하여 정체를 드러내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그러다 결국 예수께 꾸짖음을 듣고 쫓겨납니다.
즉 귀신은 의도적으로 예수께 시비를 걸어놓고선 일부러 쫓겨난 것입니다.
귀신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외친 것도, 사실은 예수님 들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보란 듯이 회당에 모여있는 청중들에게 들려주려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들은 왜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려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그렇게 무력하게 쫓겨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것이 복음 사역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것은 귀신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능력’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위해 귀신들은 하나 같이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는 자리에 언제나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 지르다 쫓겨 나가는 모습을 반복합니다.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자살 특공대같이 모여듭니다.
마치 가미카제 전투기들이 미 항공모함 활주로를 부수기 위해 달려드는 듯한 모습입니다.
사단 마귀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가 가진 것들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진리를 인용하고 선포하고 심지어 자신이 패배한 듯 물러서는 모습까지도 서슴없이 보여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더러운 귀신이란 그래서 더러운 것입니다.
빙의자로 하여금 불결한 행동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와 진실조차 부정한 목적과 동기로 행하기에 더러운 귀신입니다.
더러움의 반대말은 정결함입니다.
레위기에서 정결함이란 거룩하게 구별하고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반대말인 부정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단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정결하다 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더러운 목적과 동기로 진리를 동원하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귀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습니다.
동기와 목적과 방향을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목적과 동기와 방향을 하나님께 향하고 그와 함께합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살아내야 합니다.
믿는 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사는 수준에 맞춰서 믿음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을 가지고 내 악한 본성을 방만케 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할 겁니다.
성도가 온전히 성숙하기까지 주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하지만,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어서 요구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더러움은 주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용하려 하여 그의 기다림을 이용합니다.
마음 주시지 않았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악한 본성의 고삐를 풀어주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심지어 그건 내 의무가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는 단계까지 이르려 합니다.
주님의 인격을 더러운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질서 안의 역할과 의무를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정결한 진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악한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본성을 거슬러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아야 합니다.
질서와 역할과 의무를 향하여서 선한 양심을 갖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정결한 믿음으로 살아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