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의사로서,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도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많은 관심과 독특한 관점의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사역은 예수님의 핵심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나병환자와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에는 다른 복음서들의 평행 본문들과 달리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눅5:17)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병환자와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사역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써,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계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주셨다는 표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셨다고 여러 번 표현하여 강조하는 것은,
나병이라는 것이 율법에서 부정함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한센씨병, 소위 문둥병이라고 불렸던 나병은, 발병 시 피부와 조직을 썩어가게 만들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며,
전염성이 있다는 부분에서 인간의 죄악과 많이 닮았기 때문인지,
정결함과 부정함의 구별을 핵심 주제로 다루는 율법서인 레위기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는 질병입니다.
율법이 설명하는 정결과 부정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더러운 곳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더러운 것이 되듯이,
부정한 것에 닿는 모든 것들은 함께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부정해진 나병환자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쫓겨나 율법에 따라 성밖에 거주해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부지 중에 사람을 마주치게 될까 봐 나병 환자들은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율법에 따라 격리되어야 할 나병 환자가 예수를 찾아 동네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급하게 예수를 찾아 달려왔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예수님은 정말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단순히 치료하신 게 아니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것에 닿으면 부정해지는 법인데,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이 닿자 오히려 나병환자가 정결해졌습니다.
이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은 부정한 것에 닿았을 때 함께 부정해지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씻어 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메시야였습니다.
예수님은 깨끗해진 이 나병환자를 정결 예식을 위해 곧장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에게 보냅니다.
중간에 다른 곳에 들러 늦어지지 않도록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까지 아무에게도 들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졌다는 사실, 부정한 자가 정결한 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살아있는 증거요, 초대장이었습니다.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 오셨다는 증거가 예루살렘에 당도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더러워진 자들, 하나님께 속하지 못하는 버려진 자들에게 희소식이 날아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에 예수를 만나러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부터 병자들뿐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까지 갈리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가버나움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꼴찌로 도착한 사람들은 급기야 지붕을 뚫고 자신들이 데려온 중풍 병자를 침상째 매달아 예수님께 내려보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나름의 사연이 있었겠지만 내 코가 석 자인 사람들은 새치기를 감행했습니다.
이들에겐, 예수님이 늦더라도,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이들을 만나주시고 고쳐주실 분이시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예수님이 언제 또 한가한 곳으로 몸을 숨기실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오늘 예수를 만나 문제 해결을 보아야 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에겐 예수님이 그저 추구해야 할 문제 해결의 방편이었습니다.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 오셨건만,
그 소식에 모여든 사람들은 깨끗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목적과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여 있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보신다는 표현이 나오면,
그것은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어 우리도 함께 주목하도록 하시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음을 보셨을 때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물을 수선하는 베드로를 보셨을 때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셨을 때 뒤집어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목하여 보신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지금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이 바른 믿음의 모습에까지 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실 그들이 마땅히 바라야 했던 것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너의 죄가 사함받았느니라”
그렇습니다.
그것이 원래 부정한 자들이 바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바람처럼,
메시야를 만난 죄인들의 바람은 정결케 되는 용서의 죄 씻음이었어야 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기대와 믿음을 보시고,
반드시 바른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는 상냥한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