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뜯고 달아 내려진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은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죄 사함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가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여있는 무리들이, 신성모독으로 몰려 목숨까지 위협받게 될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 보길 원하시며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의 충격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가르치시던 집에서 나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예수를 따라 나온 사람들이 도착하게 된 곳은 세관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레위라는 세리 한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레위는 세리라는 직업 자체만으로도 모든 유대인들에게 죄인이라는 판단이 끝난 사람입니다.
로마에 바쳐질 세금을 대신 징수한다는 것은 민족의 반역자요 배신자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세관원에 앉아있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이 아닐지라도 모두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방금 전 ‘인자에게 죄 사할 권세가 있음’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그대로 증명이라도 하시려는 듯
그 동네에서 가장 확실한 죄인인 세리 레위를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번엔 아예 그 죄인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목격한 사람들에게 분명 쇼킹한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레위는 즉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곧바로 예수를 따릅니다.
그가 예수의 부르심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과 갈등과 주저함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단 한 번의 부르심으로 레위는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레위는 기쁨으로 잔치를 엽니다.
그동안 그를 묶어놓고 억누르던 양심의 갈등과 멸시적 시선과 사회적 낙인의 굴레에서 단번에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의 잔치에 함께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이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 일행이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어겼다고 생각하여 매우 불쾌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잔치가 끝난 후 배 두드리며 나오는 예수의 제자들을 보고 딴지를 걸며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인지, 왜 민족의 배신자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인지를 따져 물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한 빵에서 나누어 먹고 같은 그릇에 손을 넣어 초를 찍어 먹는 행동이
죄인들과 함께 부정함을 섞는 불결한 행동이라면서 예수의 제자들을 타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불쾌감 표출은 그들이 불과 몇 시간 전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가르치셨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것에 닿은 것으로 인해 부정해지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정한 것들이 예수께 닿을 때 정결하게 만드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것을 씻기는 물처럼 부정함을 씻기시는 분이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고, 중풍병자의 죄도 깨끗하게 씻기시는 분이심을 그들도 직접 보았으나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수를 문자적 율법주의와 공로주의, 그에 따른 보상주의의 세계관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에 ‘묵은 포도주를 먹고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이 없다’며 한탄하십니다.
포도주는 오래 묵어야 맛이 깊어집니다.
막 담근 포도주는 그 떫은맛으로 인해 상품 가치가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싸구려로 여깁니다.
깊은 맛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새 포도주로 비유하십니다.
새로운 맛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묵은 포도주를 좋아합니다.
묵은 포도주처럼 나의 마음속에 오래 묵혀왔던 생각들을 더 좋아합니다.
해묵은 감정을 음미하며 확증편향 안에서 사고하는 것을 즐깁니다.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합니다.
그래서 나의 세계관에 천장을 부수고, 과거의 누적으로 쌓아 올린 나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굴러들어 온 돌’을 불편해하고 불쾌해합니다.
그러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면 거절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내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성을 만족시켜 줄 적당히 익숙한 맛의 말씀을 기대합니다.
말씀과 상관없더라도 친근하고 익숙한 분위기의 공동체를 더 선호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맛이 나의 본성을 자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맛은 너무 떫고 텁텁하고 묵직하고 너무 둔탁합니다.
그러나 이 새 술은 그야말로 새로운 맛입니다.
내가 경험해 본 것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에 어울리지 않는 맛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맛은 죄의 본성을 거스르는 맛입니다.
이 새로운 맛을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완전히 새로워진 사람뿐입니다.
주님은 죄인 된 우리를 불러 새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워진 사람만이 그 맛을 알아봅니다.
주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우리 안에 새 포도주의 맛으로 가득 담으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