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던 불평은
이내 먹는 것 자체에 대한 지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 문화에서 일 년에 나흘 정도 공식적으로 시행하던  금식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할 만큼 경건에 전문가(?)들 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경건의 금식에 동참하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는 것이냐고 타박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유대 관습상 공식적 금식에서조차 예외 사항으로 여겨지는 혼인 잔치를 언급하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른 이들의 기쁨과 즐거움에 초를 치기 위해 금식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회개하여 돌이켜 기쁜 마음으로 배설한 잔치에 참석하여 그와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는 것이 정상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가버나움의 세리였던 레위가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돌이키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 일행이 정결함을 잃고 경건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식의 진정한 이유를 잊어버린 체 금식이라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경건을 삼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금식하는 지도 모르는 체 금식을 하고, 또 사람들에게 금식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결코 금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경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율법에서 명령하는 금식은 오직 일 년에 한 번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금식은 자발적인 자원으로 생겨난 관습들입니다.
성경에서 명령하시는 금식은 레위기 16장의 속죄일 날 하는 금식뿐이었습니다.
레위기 말씀에서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금식이란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괴로움을 멀찍이 떨어져 불구경하듯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괴로워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슬픔과 타인의 고통에 깊숙이 함께하기 위하여,
그들의 슬픔과 고통에 연합하기 위하여, 동참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의 목적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우리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시려고, 연합하시려고 40일간 금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를 대신하시려고, 그분은 금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것처럼 결혼식과 같은 기쁨과 즐거움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함께하는’ 금식의 원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금식이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유도 모르는 체 경건의 일환으로 금식을 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작 금식해야 할 순간은 따로 있다며, 금식해야 할 순간에 대해 덧붙여 가르치셨는데,
그때는 바로 신랑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리는 신혼부부의 잔치를 예화로 드시면서
그 기쁨과 즐거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청천벽력 같은 일에 대해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때에는 금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함께 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과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동참하고 연합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 글을 읽는 우리는 모두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때에는 우리가 금식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거든, 우리는 그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 사건에 동참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진정한 금식인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생전에 우리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이것이 죄에서 돌이켜 기뻐하는 사람들이 참여해야 할 금식이요,
새 부대가 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새 포도주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내 것이 되는 것(골1:24),
그것은 세상은 감당하지 못할 폭발적이고 급진적인 복음이 됩니다.
우리의 비참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다리고, 도와주고, 희생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며, 곁에서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이란,
하나님께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단식농성이나 투쟁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써 맺어지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는 주님의 폭발적이고 급진적인 십자가의 사랑을 가득 담은 새 부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