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새로운 계시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갈릴리의 어느 산 중턱 평탄한 평지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산상수훈이라고 불리곤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복음서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설교도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설교도 모두
현장에서 받아적은 글들이 아니라 훗날 성령에 의해 감동된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으로 기록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선포된 예수님의 가르침이야 당연히 진리였지만
성령에 의해서 저자에게 기억되고 요약되어 우리에게 전달된 복음서의 성경 구절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산상수훈의 내용을 가르치시며 모여든 백성들을 제자로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들이 되도록 그들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 것인지 교회의 정체성이 산상수훈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배고픈 자, 우는 자, 인자로 말미암아 욕을 먹고 버림받는 자도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배고픈 자는 배부르게 되고, 우는 자는 웃게 되고, 욕을 먹던 자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배고픔과 슬픔과 비난이 역전되는 것이 복이라면 분명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기는 기쁨의 소식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기어코 저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받는 자는 화가 있다고 연달아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 보입니다.
배고픔이 복이라면 왜 배부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계속 배고픈 채로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눈물짓는 슬픔의 울음이 복이라면 왜 웃음을 얻어야 합니까?
늘 울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난 그 자체가 복이라면 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요?
또한 배고픔과 비난받음 자체가 복이 아니라면,
그래서 가난함에 머물러 있지 않고 거슬러 행하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면,
어찌해서 배부름과 기쁨의 웃음과 칭찬이 화가 된다는 것입니까?
대체 가난과 배고픔과 슬픔과 비난에서 벗어남이 복이 된다는 것인지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인지 이 모순적인 가르침에,
듣는 우리는 ‘복’이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가난함 그 자체가 복이 아니라면, 가난함에서 부유함을 추구하고 배고픔에서 배부름을 추구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면,
대체 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요?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과 화는 가난이나 부요함이나 배고픔이나 배부름과 같은 어떤 ‘상태’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판단하는 가치관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을 언급하시며 ‘복’이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자가 부요해지길 바라는 본성의 욕구가 세상이 판단하는 가치에 의해 설명되는 자연스런 추구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본성을 거스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본성을 거스른다는 것은 욕구의 반대 방향을 향해 역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새로운 계시로서의 진정한 ‘복’은,
배고픔이 아닌, 그렇다고 배부름도 아닌, 본성의 욕구 추구의 방향성 그 자체를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은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로 대표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부유한 자로 대표되어지는 세상의 나라를 대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란 하늘의 상급을 기대함으로 기뻐하며 뛰놀아야 하는 곳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어머니 뱃속에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기뻐하며 뛰놀았던 것처럼,
우리를 의와 생명과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진정한 왕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가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기뻐하며 뛰놀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기쁨으로 뛰노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해서,
가난한 자 처럼, 배고픈 자 처럼, 우는 자 처럼, 버림받은 자 처럼 스스로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가 그토록 사모하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복을 얻은 사람은 주님이 다른 것을 주시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