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움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율법은 원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철저히 받은 만큼 되갚아 주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적 원리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말씀 같아 보입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범죄자와 행악자들을 반드시 심판해야 할 터인데,
원수를 사랑하려면 죄악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새로운 계시로서 율법을 거스르는 삶을 명령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정의와 사랑이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정의와 사랑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정의를 동반합니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정의를, 그 아들 예수를 보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가장 먼저, 가장 완벽히, 가장 극적으로 순종하신 이는
다름 아닌 ‘원수를 사랑하라’고 선언하신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 우리는 모두 타락한 본성의 욕구를 따라 살기에 바빴던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율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순종을 우습게 여기며,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 여기고 살던 반역자들입니다.
율법에서 명령하신 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라면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의 결국은 모든 것, 곧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생명까지도 하나님 앞에 범죄의 댓가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모두 감당하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원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이자,
죄인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심판해 버리신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정의의 십자가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실 때 예수님은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신 분도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눈을 가리고 뺨을 치며 누가 때렸는지 맞혀보라는 병사들에게 묵묵히 다른 뺨을 내어주셨고,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 제비뽑아 가져가도록 내어주셨으며,
‘저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른다’며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기도하시곤 끝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아가라는 요청이 됩니다.
예수께서 원수들을 위해, 죄인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하셨던 일은,
예수를 사랑하여 그의 길을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사람들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모든 일을 행하심은 오직 한가지, 원수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물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원수들을 바꾸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행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원수를 만나면 그가 더 이상 원수로 남아있지 못하도록 그 원수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알려주신 원수를 사랑하는 법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원수에게 뺨을 돌려대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뺨을 치는 상대의 폭압을 방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뺨을 내어주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샬롬의 인사입니다.
목을 어긋 맞추어 안고 서로 평안을 나누는 입맞춤입니다.
마치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달려가 뺨을 내어주며 입을 맞춤같이,
우리는 원수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얻기 위하여 샬롬의 악수를 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신을 팔아넘기려 찾아온 가룟 유다의 입맞춤에도 뺨을 내어주셨습니다.
배신하고 배반하고 생명을 노리는 자에게까지 뺨을 내어주시는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은 이로써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원수에게 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가 뺨을 내어줄 때,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