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비유를 언급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니…
누가 누굴 인도하고 누가 누구의 길을 가르치는 것인지 어처구니없는 난센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처럼 잘 정비된 도로에서 보도블록 하나 움푹 파인 것 같은 불편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맹인은 인도자 없이는 혼자 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당연한 위험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건 대담하다 못해 참담한 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비유에서 어처구니없는 것은 맹인이 무슨 자신감으로 다른 맹인들을 이끌고 길을 나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까지도 위험에 내몰게 하는 짓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선생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입니다.
잘 준비된 전문가라는 자의식이 그를 주제넘은 인도자의 자리에 나서게 합니다.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런 비극적인 난센스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는 이런 난센스의 사례가 즐비합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잘 준비된 선생이요 인도자이며 의사라고 자부하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들보’란 천장의 하중을 받아서 지탱하게 하기 위해 천장을 가로지르도록 설치하는 서까래 용도의 나무 목재를 말합니다.
작은 물건도 눈앞에 두면 커 보이는 법인데 하물며 들보가 눈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이 들보에 가려져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맹인이라면 형제 눈 속의 작은 티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볼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사람이라면 들보처럼 거대한  자신의 흠결을 보지 못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보를 외면하고 티를 발견하려는 이들의 행태를 ‘외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위선이라는 단어로써 원래 뜻은 ‘배우’입니다.
그러니까 연기하고 있는 것이죠.
일종의 선택적 맹인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보면서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들보는 보이지 않는 척합니다.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때, 내 눈 속엔 들보는커녕 티 하나 없는 척을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 눈이 정상이라는 증거를 다른 이들의 흠결에서 찾으려 합니다.
즉 외식하는 위선자란 정작 봐야 하는 것은 보지 않고, 은혜로 덮여야 하는 것을 들추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악한 본성과 죄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들보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 위선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때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을 가리기 위해 이렇듯 다른 이를 탓하며 나무 뒤에 숨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선자들이 보통의 일반인들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들이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생의 자격, 인도자의 자격, 리더의 자격이 없는 맹인을 따라나서면 곤란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기 위해 비유로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좋은 선생, 좋은 인도자를 만나는 것은 인생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애초에 맹인이 자신을 이끄는 인도자가 맹인인 것을 알았다면 따라나섰을까요?
알았다면 그는 맹인이 아니었겠지요.
자신의 인도자가 맹인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없다면 이런 난센스는 현실에서도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르는 사람이 맹인인 채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들보 뒤에 숨어서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 죄성에 눈감아 버리는 위선적 맹인의 눈에서 들보를 빼야 한다면,
이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은 앞서가는 맹인뿐 아니라 따라가는 맹인에게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어야 올바른 방향과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들보를 메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 죄악의 모든 하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제 예수를 우리의 유일한 인도자요 영원한 선생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마다
들보를 외면하지 못하고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들보는 우리 눈의 가림막이 아니라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나의 죄악은 날마다 그 위에 달려 죽어지고,
다른 이의 행실은 십자가의 은혜로 덮어지게 될 것입니다.
들보를 뽑는 방법,
그것은 들보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은혜를 보지 못하던 맹인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