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의 마지막을 책망의 어조로 가르치시며 마무리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주여 주여 하고 부르고 있지만, 정작 너희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있다’라는 예수님의 질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내가 정말로 너희의 주인이 맞다면, 너희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나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너희의 삶과 행동을 보니 대체 누가 누구의 주인인지 모르겠다.
너희의 주인은 누구냐? 나냐? 아니면 스스로가 너의 주인이냐?” 하고 수사학적으로 물어보십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말씀처럼 누군가의 삶과 행동을 보면,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주인으로 여기고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하늘도 날 수 있습니다.
말로는 영원한 사랑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말로는 얼마든지 흔들리지 않을 듯한 신앙을 고백하고,
얼마든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믿음의 진위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부분이 행함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한다면,
그때는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그의 믿음이고 그가 의지하는 삶의 기준이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부분은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과 그의 삶이 동일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앞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셨던 것들이 그들의 삶에 실제적인 행함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행함을 그 무엇보다 강조하고 계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네, 제가 원수를 사랑하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을 걷어내고 원수에게 뺨을 돌려대는 평화의 행함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자신이 자기 인생의 진짜 주인인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함과 믿음 중에 믿음을 중하게 여기고 행함은 경이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그 사람은 동일하게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도 동일하게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 것 또한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아 구원 얻을 수 있는 원인을 찾는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죄악의 대가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죽임당하셨습니다.
우리로서는 전혀 만족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것에 순종하시어 의로움을 얻어내셨습니다.
이로써 얻게 되는 생명과 복과 의로움을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신부 된 교회에게 거저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우리 대신 죽임당하시고 우리 대신 율법을 행하신 공로와 순종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행함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의와 생명과 복에 믿음으로 참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의 나라에 행함으로 참여합니다.

사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와 새 계명을 선언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선포하시기 이전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유대 지역, 심지어 두로와 시돈에서까지 몰려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기대와 이해로 몰려든 무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에 합당한 사람들로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까지 그들의 삶은 예수님의 기대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제 막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들도 있고, 무엇보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이제 막 선언된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하여 가르치시자마자 곧바로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느냐고 꾸지람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벌써부터 행함의 부족함을 지적하신다니,
혹시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조급하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내는 일은 내일 일로 미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준비되고 성장하고 나중에 가서 미래의 어느 날 갖춰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우리 주 예수께서 이미 다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독촉은 우리가 천국을 미래형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종말을 미래에서 끌고 와 오늘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어느 집이 반석 위에 있는지 모래 위에 있는지는 탁류가 들이칠때가 되면 확인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홍수가 몰아치는 순간에도 우리는 천국을 오늘로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