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과연 어떤 것인지
말로만이 아니라, 이후 만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행동으로 보여주려 나서셨습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주여 주여’라고 간절히 자신을 부르지만
정작 예수를 진정한 주인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켜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은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예수님은 그 예시를 한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백부장도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모래 위의 집처럼 허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감탄하셨습니다.

사실 백부장은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찾아오기 이전부터 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피지배 유대 지역의 현실 생활 속에서 권력의 실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자상한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종을 가리켜 그는 종이나 노예라고 부르지 않고 ‘하인’, 즉 직역하면 ‘내 소년’이라고 종을 부릅니다.
그는 자기 종을 사물이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한 명의 사람으로서 대우했습니다.
‘사랑하는 종’이라는 한국어 성경의 표현은 직역하자면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랫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에,
그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그를 살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실 백부장이 종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신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종의 입장에선 주인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백부장은 장로들이 예수께 그에 대하여 소개한 것처럼 그는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위해 그 지역에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백부장이 하나님을 믿고 유대교를 따르는 경건한 이방인이었음을 뜻합니다.
원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회당의 예식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부금 등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진정성을 인정받은 이방인 만큼은 회당 밖에서 예식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그렇게 유대교도로서 인정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은 아끼는 종이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예수를 찾아 나설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되었을 만큼
사회적 신분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예수께 ‘이 사람은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장로들의 부탁을 듣고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는 동안,
백부장은 벗을 보내어 예수님이 자신의 지붕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장로들은 그가 자격이 있다고 말했는데,
정작 백부장 본인은 자격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했던 것과 같은 심정의 낮아짐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이방인일 뿐 아니라 더럽고 부정한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 앞에 나설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자격 없음을 깨닫는 것에 그저 머물렀다면
그러한 믿음은 예수님께 ‘이만한 믿음’이라고 감탄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탄하신 믿음은 그 이후의 모습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백부장은 자신에게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자신에겐 자격이 없지만, 은혜를 구할 권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종을 구원해 주실 것을 신뢰하며 말씀으로 명령하시어 병을 고쳐주십사 간청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선의를 기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를 ‘주여’하고 부른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할 권리와 자격이 없지만 주인의 은총과 사랑의 통치를 그저 신뢰하고 따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주인’의 선하심과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기대합니다.
이는 마치 백부장이 자기 종에게 베풀고 있는 자비와 같은 것이었기에,
백부장은 선하신 주인의 완전한 통치를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 백부장은 예수님의 통치 아래에 들기를 소망하며 ‘주여’하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감탄하신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으로 인한 자격 없음을 알고 스스로에겐 절망하되,
자신의 것을 내세움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바라보며
진정한 주인의 사랑과 은총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대함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인맥을 기대함이 아닌, 커뮤니티의 인정을 기대함이 아닌,
사람을 믿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기대하는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인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