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나인성을 향해가셨습니다.
나인성은 갈릴리 북쪽 수넴 지역의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은 별도의 목적지를 향해 가시던 중 잠시 나인성을 지나쳐 가신 것이 아닌, 애초에 나인성 자체를 목적지로 하여 출발하신 것이었습니다.
나인성은 너무나 작은 마을이었기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을 모두 이끌고 그곳으로 향한 것은 정말 의외의 행보였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와 그 아들의 장례 행렬을 만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장례 행렬을 만나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모든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간과 장소와 날씨와 상황까지 모두 하나님의 섭리하심 안에서 정밀한 시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일행은 장례 일행이 성문 안에 있을 때도 아니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도 아닌,
성문을 나서는 바로 이 순간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나인성 앞에 당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 일행은 과부와 그 아들의 장례 일행을 길에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한쪽에선 사망 권세에 굴복당한 청년의 시신을 세마포에 감아 들것에 매어 나오는 무리들이,
마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처럼, 성 밖으로 내몰리는 문둥병자처럼,
죽은 시신을 앞세워 성문에서 나오고 있었고,
다른 쪽에선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생명의 예수님을 필두로 하나님 나라의 무리들이 나인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망의 무리와 생명의 무리가 길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막아서시며 손을 들어 상여를 잡아 그들의 행진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찾아오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과부에게 있어 외아들이란 삶의 희망이자 기쁨이며, 대화 상대로서 유일한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로서 남편 같이 의지해 온 사랑의 결실이었습니다.
과부에게 있어 아들을 잃는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여자는 유산을 상속할 수 없었기에 혹시 남편이 남겨준 유산이 있었다면 그 모든 것들은 외아들의 이름으로 상속받아 누리던 것들이었습니다.
즉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이제 장례가 끝난 다음 날부터 과부의 모든 생계 수단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과부는 심정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것을 잃었다는 표현은 과부에게 있어서 과장이 아닌 현실이고 실제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과부 역시 죽음의 권세에 버려지게 된 비참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의 비참함에 던져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사망의 행진을 막아서신 예수님께 그 누구도 죽은 자를 되살려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며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생명과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만유의 진정한 주인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타깝게 요절한 사람들을 되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이 목표였다면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죽은 자를 살려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단 3명의 사람만을 죽음에서 되살려내셨습니다.
즉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적은 그 자체가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라,
그분의 진정한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이 일을 예언 해왔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시절에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었던 기적을 예수님은 지금 의도적으로 재현하고 계십니다.
또한 나인성 근처 지역인 수넴은 선지자 엘리사 시절에 죽었던 아들이 되살아난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으로써
구약에서부터 약속되고 있는 사망 권세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잠깐 지연시키는 정도의 승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 안에 살게 하는 완전한 승리를 위해,
예수님은 사망 권세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셔야 했습니다.
과부의 아들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들 모두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대신 죽음에 던져져야만 했습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며 예수님은, 아들의 죽음에 울고 있는 과부의 모습 속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도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세마포에 감싸 들것에 실려있는 과부의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완수하셔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있을 십자가 사건에 기대어 되살아난 아들을 과부에게 주십니다.
과부는 아들과 함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이 아닌 부활하신 아들을 내어주십니다.
그 아들을 받은 사람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이땅의 현실에서부터 누리는 천국을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