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전해 들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유대 지역의 통치자였던 헤롯 안디바의 불륜을 지적하고 책망하여 수감된 상태였습니다.
비록 요한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얼마 전까지 들려왔던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소망의 기대를 고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자신이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을 증언하고 공증했던 예수가,
갈릴리의 어느 평탄한 고원에 모여든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여겨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셨다는 산상수훈의 소식은,
모든 유대인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구약의 약속,
즉 메시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었음을 선포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려온 예수님의 소식은 세례 요한으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들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한다면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시며 유력한 사람들을 만나 세력을 불리고 군대를 모아야 할 테지만,
예수님의 실제 행보는 그런 모습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설립되면, 구약의 예언대로 의를 위해 투쟁하다 갇혔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을 잊으신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하시는 것인지 갇힌 자들에 대해 실제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성전과는 거리가 먼 갈릴리에서 활동하고 계셨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실 뿐 아니라
나인성과 같은 갈릴리 지역 깡촌을 순회하며 이름 모를 어느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들도 절반이 여자와 어린아이인 오합지졸들로서 군대로 편제할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요한으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인류가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되살린 것도 아닌, 다만 몇 사람을 되살려 그저 몇 년간 더 살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청년을 되살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건국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될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메시야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제자 둘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세상 짐을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니라고 의심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질문 속에 ‘다른 이’란 문법상 사람뿐 아니라 물건이나 공간,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요한은 유대 민족이 기다리던 ‘왕의로서의 메시야’는 지금이 아닌 별개의 시점에 따로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
즉 메시야가 하실 일이 나누어져 있는 것인지를 문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의 질문은 핵심을 정확히 짚은 질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고 우리 대신 율법에 순종하러 오셨지만,
그분의 사역은 이 땅의 왕으로서 절정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절정을 맞이할 것이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되살리신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셔야 할 궁극적인 사역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그가 하실 사역의 끝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모든 믿는 이들의 왕으로서뿐 아니라 훗날 이 땅의 진정한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구약을 살아온 사람들로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에 대해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으나,
세례 요한만은 예수님의 이 사역에 구별됨을 인지하여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두 명의 제자를 보내어 질문합니다.
두 명은 성경에서 인정하는 최소한의 증인 수 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예수님께 공식적으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공증했던 사람이 공식적으로 질의를 한다면 그 파장이 어떨지 요한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요한은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요한에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면 제자 두 명을 보내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의심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여 물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진리가 드러나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의심을 덮어놓지 않게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에게 질문할 용기를 줍니다.
진리 앞에 해결되지 않을 의심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직면할 용기를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