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는 다른 바리새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개방성입니다.
예수님은 평소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비판하셨고, 바리새인들도 그런 예수님께 적대적이었기에
시몬의 초대는 동료들의 반대와 질타를 무릅쓴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를 전적으로 따라나설 각오로 그를 초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고선 발 씻을 물도 주지도, 환영 인사로서 포옹과 입맞춤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초대했지만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경계심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식사가 시작되었을 때,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다가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몬은 그녀가 그 성읍에서 소문난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녀는 분명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자를 선대하라는 율법의 명령에 따라 가난한 누구든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별도의 식탁을 따로 준비하곤 했습니다.
그 덕에 그녀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 위에 눈물을 쏟더니, 목걸이로 메고 있던 작은 병을 깨어서 향유를 예수님 발 위에 부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남자들 앞에서 머리를 푸는 이런 행위는 이혼 사유가 될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향유의 향기로 단장하는 여자들은 로마의 귀족 부인이 아니라면 주로 몸을 파는 여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녀가 자기의 발을 닦는 동안 그녀를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시몬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요 선지자라면 자신을 만지는 저 여자가 얼마나 부정한 죄인인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정결과 부정의 구별이란 율법의 핵심이요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뜻 자체가 정결과 부정을 구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라는 판단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시몬에게 두 명의 빚진 자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5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0데나리온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자 주인이 둘 다 탕감해 주었다면
둘 중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는 물어보십니다.
시몬의 생각에도 더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하는 법이었습니다.
시몬의 대답대로 그 점이 바로 시몬과 여자의 차이였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너무도 잘 알았기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감격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
지금껏 여자의 몸으로 홀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하여 의지했던 자신의 유일한 힘,
곧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을 예수님의 발 앞에 쏟아 놓습니다.
풍성한 머리칼과 향유로 단장한 그녀의 매력은 더 이상 그녀에게 세상을 살아갈 무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통치자와 왕이 되어주시는 분 앞에 나아와,
자신의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그 분의 발 앞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 전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자신의 인생에 전적인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천국의 메시지는 원했지만,
그 천국의 통지차로 오실 메신저인 예수님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내 삶의 주도권과 통치권을 내어드리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결하게 지켜온 내 삶의 자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을 집에는 초대했을지라도 삶으로는 초대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시몬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정히 다독이시고 가르치십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그의 인생에 초대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를 천국 복음으로 부르셨습니다.
시몬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은 결론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정히 이름을 부르시며 죄인을 찾아오셨다는 것에서 우리는 소망을 발견합니다.
비유 속의 빚 진 자 두 명은 모두 탕감받았습니다.
한 명만 탕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주께서 시몬의 빚도 탕감해 주신 분이심을 전제합니다.
남은 것은 시몬이 자신을 50데나리온이 아니라 500데나리온, 아니 달란트보다 더욱 빚진 자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향유를 쏟아붓던 여자의 감격은, 이제 시몬에게서 시작될 것입니다.
내 죄악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때,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깊은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다정히 우리를 불러 사랑의 불씨를 키워가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