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티광염교회는 예수님께서 빛과 소금의 비유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5장에서 그 이름을 지었습니다.
뉴시티광염교회가 옥정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도하며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이름에 뉴시티광염교회의 비전과 방향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에,
사람들은 본문을 근거로 교회가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금의 역할이란 바로 생선에 소금을 쳐서 보관하듯,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그리고 썩지 않도록
지켜 보호하는 역할이라고 쉽게 결론 짓고는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대사회적 목표는 정의구현이나 구제와 선행이 되고는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도 비슷하게 이해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인 교회는 어둔 세상을 밝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사회의 감시자요, 선행의 기준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비슷한거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행태에 실망할때면 마태복음 5장의 빛과 소금의 비유를 인용하며 교회를 정죄하고는 합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정의를 내세우고 지켜야합니다. 교회는 구제해야 합니다.
사회에 선행과 의로움의 기준이 되어주고, 타락을 경계하는 감시자의 역할도 해야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소금과 빛의 비유는 사실 그런 주제의 내용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소금처럼 부패를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줄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둔 곳을 비추어줄 찬란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보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라고 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보고 산위에 동네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꺼져버린 불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할 때,
헬라어로 세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땅, 흙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번역되어서인지 소금에 선입관이 생깁니다.
하지만 문맥을 잘 살펴보면 소금을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저 예수님은 소금의 짠 맛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선 암염을 물에 담궈 짠맛을 빼내어 사용했습니다.
짠맛이 나지 않는 소금돌은 더이상 암염이 아닙니다. 그냥 돌입니다.
그냥 돌맹이일 뿐이라면 아무도 주방에 모셔두지 않습니다.
땅에 버려져 뒹굴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미 땅에 버려져 뒹굴고 있는 ‘땅 위의 소금’인 것이지요. 

우리는 땅에 버려져 밟혀야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대신 버려지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에수님이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어찌해볼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이 오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 대신 짠맛이 되어주시고,
생명이 없는 우리 마음 가운데에 들어와 거주하시며 사람사는 마을의 불빛처럼, 빛을 드려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소금과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갈 뿐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될것입니다.
예수의 빛과 맛을 내는 사람들.
뉴시티광염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