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갈릴리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며.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바위에, 가시떨기에, 그리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뜻을 물어보는 제자들에게 그 뜻을 플이해 주셨는데,
제자들뿐 아니라 모여있던 사람들 모두가 이 비유의 해설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이들은 비유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비유 속의 길가, 바위,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처럼 말입니다.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예수님은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씨는 말씀을, 땅은 마음을 말합니다.
말씀이 길가와 같은 마음에 떨어지면 새가 씨를 주워 먹듯 마귀는 곧바로 말씀을 낚아채 가 버립니다.
이는 말씀에 관심이 없고 기대가 없기에 말씀이 마음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씨가 바위에 떨어지면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해 수분을 머금지 못하고 뙤약볕에 말라 죽어버리듯,
말씀이 돌밭과 같은 마음에 떨어지면 뿌리 내리지 못한 얄팍한 신앙은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배운 것과 무관한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땐 기쁨으로 받지만,
그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았기에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깊은 진리의 샘을 머금을 수 없었던 탓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에 떨어진 말씀은 깊이 있는 생각과 진지한 사고로 말씀이 뿌리내리긴 하였으나,
둘러싼 가시떨기의 가득한 가시가 새싹과 잎사귀와 줄기를 찔러 성장하지 못하게 하듯,
여러 가지 염려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데 주저하게 하고 결국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말씀을 깊이 탐구하고 사고하여 깊이 있는 신앙을 이룬 마음 밭일지라도
삶에 대한 고민과 생각마저 깊이 있게 고찰하는 탓에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신앙과 함께 커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마음과 다르고 기대와 다른 통제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한가운데 독자적인 ‘나의 나라’를 구성하여
마음속 다른 한편에 자리 잡은 ‘주의 나라’와 사사건건 부딪쳐 갈등하는 탓에
결국 말씀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이 비유를 들으면 우리는
‘아하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밭을 잘 가꾸어야 하는 거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가 없고 소망이 없고 관심이 없고 고찰이 없고 소화가 없고 포기가 없고
믿음이 없는 구제 불능의 사람임을 말입니다.
아마 스스로 좋은 땅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의로운 공로를 인정받아 의롭다하심을 받는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이 인간 중에 있을까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땅이 스스로 알아서 비옥하고 촉촉한 좋은 땅이 될 수 없듯,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수련하고 단련하고 관리하여 의롭고 좋은 마음으로 가꿀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비유대로 좋은 땅을 일구어 열매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 ‘열매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을 찾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씨 뿌리는 농사의 비유를 가르치신 것일까요?
그것은 씨를 뿌리는 이유와 농사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씨를 땅속에 심는 것은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귀중품 숨기듯 비밀로 하기 위해 파묻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흙 속에 심는 이유는 열매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씨를 뿌리듯 가망 없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이유는
그들을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졌어도, 바위 위에 떨어졌어도, 길가에 떨어졌어도
농부는 사실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자신이 기경해야 하는 자신의 밭이기만 하다면
농부는 씨를 뿌린 이후에 쟁기질을 합니다.
돌밭이면 부수어 갈퀴로 긁어 돌을 골라냅니다.
가시떨기는 삽으로 갈가리 잘라내고 뽑아버립니다.
길가처럼 단단한 땅도 모두 갈아엎어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래야 뿌려진 씨는 흙 속에 심어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농사짓기 좋은 땅이란 없습니다.
땅은 원래 강퍅한 법입니다.
땅은 원래 척박한 법입니다.
비옥하고 부드러운 좋은 땅이란 농부의 수고를 기다리는 단어입니다.
좋은 땅에는 농부의 수고가 숨겨져 있습니다.
농부의 눈물이 심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강퍅한 우리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굳은 땅을 뒤엎고 가시와 돌밭을 들춰내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열매 맺으신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게 하여
그 열매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좋은 땅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가 십자가와 함께할 때,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
‘주와 함께하는 주의 가족’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