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배를 타고 광풍이 몰아치던 갈릴리 호수를 지난 예수님 일행은 무사히 거라사인들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거라사라는 도시는 원래 갈릴리에서 남동쪽으로 60km 떨어진 데가볼리라는 지역에 속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일부 지역을 거라사인들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라사 사람들이 돼지를 키우기 위해 데가볼리에서 갈릴리까지 진출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맑은 물이 풍부한 갈릴리 지역만큼 돼지를 키우기에 적절한 지역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돼지고기의 주 소비층인 로마군의 주둔지와도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갈릴리의 동쪽 데가볼리 지역은 옛날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가장 먼저 이방에 빼앗긴 구역입니다.
따라서 문화와 종교 인종까지 모두 이방화된 땅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는 이들은 거라사 출신의 이방인들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유대인들도 아닌 이방인들을 만나기 위해 광풍을 뚫고 이곳까지 오신 것은 참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곧바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옷을 입지 않고 무덤 사이에서 살며, 묶어놓은 쇠사슬도 끊어버릴 만큼 힘이 세었으나,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없이 예수 앞에 달려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불려 나온 귀신은 이미 예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척 귀신의 이름을 물어보십니다.
귀신은 자신을 가리켜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스로를 군대라고 칭할 만큼 귀신들은 치열한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물론 이 전쟁은 힘으로 하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자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 소개하던 호전적인 모습과는 반대로
갑자기 불쌍한 척을 하며 무저갱에 들어가게 하지 말아달라 간청합니다.
이는 간교한 거짓과 술책으로 하는 기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의 술수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돼지에게라도 들어가게 해달라는 귀신의 간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돼지들을 갈릴리 호수에 몸을 던지게 해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 죽은 돼지들이 2천 마리나 되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평화를 얻은 남자가 옷을 입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있는 모습과
그 어깨 너머로 죽은 돼지들이 수면 가득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본 거라사인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라사인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보다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을 더 두려워하며 떠나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등쌀에 밀린 예수님은 밤새워 왔던 곳에서 불과 한 시간도 채 있지 못하고 결국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다시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쫓아낸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정확하게 귀신이 목표로 했던 반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예수님을 내쫓게 만들기 위하여 귀신은 돼지 떼들을 몰살시켰던 것입니다.
돼지 2천 마리면 현재 시세로도 10억이 넘는 돈입니다.
돼지를 치기 위해 갈릴리까지 원정 와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돼지 떼의 몰사는 그들의 모든 재산과 삶의 목표를 모두 상실한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만 아니었다면, 예수가 귀신을 내쫓지만 않았다면,
귀신이 돼지들을 죽일 일은 없었을 테고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귀신보다 예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앞으로 보게 될지도 모를 손해가 무서웠던 것입니다.
거라사인들에게 있어 귀신 들린 사람은 통제할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단의 전략은 사람들에게 욕망의 좌절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자신들의 손으로 예수를 쫓아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이후로도 동일한 전략을 사용해 사람들의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데에까지 성공하게 됩니다.

이대로 사단과 귀신들의 승리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전략에 기만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씨앗을 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듯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의 승리가 그 땅에서도 열매 맺기를 원하시며, 주님은 이방 땅에 복음을 심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귀신에게서 구원받은 한 사람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바랬으나 예수님은 그를 고향 땅 데가볼리로 보내셨습니다.
가장 먼저 빼앗겼던 땅에 생명을 열매 맺게 하시려고,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을 심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삶이란 물리적으로 가까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한 알의 밀알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는 주님의 씨앗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