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밝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년간 신종 감염병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야 겨우 감염병으로 인한 직접적인 위협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하게 되었지만,
사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도 삼년전의 일상은 아닙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일상으로 돌아왔다’가 아니라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팬데믹 이후 비가역적으로 달라져버린 문화행태 뿐 아니라,
가속화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 특이점을 앞두고 있는 빠른 AI개발과 로봇공학 발전,
여기에 세대갈등과 남녀갈등,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양극화 현상,
인구절벽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이 더해져 우리의 내일은 한치 앞도 낙관할 수 없이 불안한 형국입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일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시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이고, 또한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낯설어야 할 것을 낯설게 여기고 사는 지혜를 주시고,
그 마음속의 지혜가 우리의 생명을 지켜,
지혜로 살아가려 몸부림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갈지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를 향하여 곧게 살아가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어느덧 누가복음을 강해한지 일 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찬양 예배와 세대 통합예배 등으로 시편과 잠언을 살펴본 것 외엔 줄곧 누가복음을 함께 보아왔습니다.
최근 누가복음에서 그려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던 사역에서 이제 행동하시는 사역으로 전환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9장에 이르러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가르치시는 사역을 마무리하시며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십니다.
그 시작으로써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방아쇠 삼아
성육신의 목적인 대속적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의 모습을 찬란한 영광의 빛 가운데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 정상에서뿐 아니라 산 아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으로서 위엄은 명백하고 충분하게 드러났습니다.
제자들은 쫓아내지 못했던, 한 청년의 간질병 증상을 일으키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산 위에서도 산 아래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직간접적으로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메시야의 버림받음과 고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승에게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직간접적으로 재확인하고서도 구속사의 계획을 여전히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고 미련한 탓도 있겠지만 성경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숨겨졌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소화하지도 못할 말들을 계속해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지금이 아니라 훗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훗날의 일을 위해 예수님은 씨앗을 심듯 그들의 마음에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심고 계셨습니다.

한편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공감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거나 의아한 부분이 있거나 헛갈리는 오해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예수님께 잘 모르겠는 부분이나 혼란스러운 부분을 여쭤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예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관련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묻기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두렵고 무서웠을까요?
그들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게 될까 봐 무서웠습니다.
괜히 물어보았다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씀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질문이 생기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질문은 턱밑까지 가득했겠지만, 묻지를 못합니다.
원하지 않는 답이 나올 것임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고 싶은 그리스도는 국가를 세우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로마를 무찌르고 왕이 되어 세상을 통치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버림당하고 고난당하고 죽음으로써 실패하게 될 비극적인 길을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니 믿고 싶은 것과 진리가 다름을 느낀 그들은 그 문제를 덮어놓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진리와 진실이 내가 믿고 싶은 진실과 다를 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사람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진리를 묻어두려 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간질병 증상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모든 능력과 위엄의 예수를 쫓은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예수를 따르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 없고 패역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섬겨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이렇듯 부족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인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 숨겨져 있습니다.
그 사랑을 겪어본 사람만이 발견하게 될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심령에 사랑을 부어주시고,
믿고 싶은 대로 믿기 위해 진실을 덮는 사람에서,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