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진 사도 요한은 사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를 따라 생활하던 중 성급하고 다혈질적이며 배타적인 모습을 노출하곤 했습니다.
사랑의 사도로서 성숙해지기까지 그에게도 성장을 위한 과정과 시간들이 필요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게 됩니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 같았던 그를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람을 온유하게 만드는 것은 주의 사랑 뿐임을 우리는 요한의 미숙하던 시절 모습을 통해 발견합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온 후 어느 날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어떤 남자를 보고
그를 찾아가 앞으로는 예수 이름을 들먹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 남자는 열두 제자는 커녕 칠십인의 제자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저작권이 달린 것도 아닐 텐데,
요한은 제자로 부름 받은 자신들 외에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에 경계심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이 귀신을 쫓은 행위는 이미 예수님께 능력과 권위를 받고도 귀신을 쫓지 못하던 동료 제자들과 비교되는 일이었고
이로써 예수의 제자라는 입지가 좁아질 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제자도 아닌 낯선 이가 내쫓았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즉시로 그 남자의 자격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옹졸하고 비겁한 행위였습니다.
이는 얼마 전 제자들이 길가에서 누가 더 크냐고 다투던 모습의 연장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바르고 정당하고 건강한지를 기준으로 살펴본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 자신들의 권위가 의심받고 위신이 실추되며 입지가 흔들릴 것만을 염려한 조치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귀신을 쫓았는데 정작 제자인 자신들은 귀신을 쫓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돌이켜보지 않는 요한과 제자들의 내로남불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더욱 두드러져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실 때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평소 사마리아인들과 원수지간이었던 유대인 제자들에게 있어 이번 일은 천인공노할 사건이었습니다.
민족적 정통성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세오경 이외의 성경들은 모두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모세오경조차 자신들의 입맛대로 수정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하는 이단자들이,
감히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배척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분노하며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마치 모세 때에 율법과 다른 방법으로 제사하려 했던 나답과 아비후를 하나님께서 불로 태워 죽이셨던 것처럼,
엘리야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체포하려고 했던 아합왕의 군사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태워 죽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예수님 편에 서 있는 한 자신들은 언제나 옳고 정당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분노였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요한이 전혀 모르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얼마 후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면 제자들도 예수를 모른다며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사람들이란 사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들도 예수를 배척할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모습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귀신을 쫓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치셨을 때 고난당하고 버림당하고 죽임당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믿고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 정복자 그리스도를 꿈꾸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하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죄를 물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야 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불이 쏟아져 심판하셔야 할 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을 때, 모든 것들은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긴커녕 귀가 잘린 병사를 고쳐주시곤 순순히 연행되셨습니다.
전날까지 호산나 다윗의 왕이라고 소리 지르던 군중들이 돌변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소리 지르고,
병사들이 옷을 벗기고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불을 내려달라 기도하시긴커녕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심판하셔야 할 분이 심판받으셨습니다.
불태워져야 할 사마리아 대신에, 죽임당해야 할 제자들 대신에,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우리 대신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진노의 불 대신 성령의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즉 온전히 의롭고 옳은 편에 서게 된다는 것은,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예수가 우리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는다면 우리는 온유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