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3편의 경우, 압살롬에게서 도망치던 때에 쓴 시라는 배경이 표제어로 붙어있었지만,
시편 4편의 경우에는 다윗의 인생 중 어느 순간에 쓰여진 시인지 소개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시를 읽다 보면 독자인 우리는 이 시의 배경이 되는 특별한 정황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가 있습니다.
시 라는 것은 결국 일반적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이나 사건에 빗대어서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유비하여 전달하는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시어를 하나씩 살펴보며 심상의 흐름을 따라 보조관념과 원관념 사이의 상징과 비유를 실타래 풀듯 찬찬히 풀어가다 보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은 진리가 우리의 감정과 생각에 효과적으로 뿌리내리도록 돕습니다.
시편 4편은 하루 일과가 끝나고 해가 떨어져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밤을 맞이한 사람의 심정에 빗대어
다윗 자신의 곤란함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실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일뿐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내 손을 떠난 일들을 많이 만나곤 합니다.
마음은 조급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마치 밤 중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의 심정이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곤란함에 처했다고 노래하는 다윗이 사용한 단어는 좌우에 도망칠 곳 없이 비좁고 막다른 곳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차르입니다.
즉 다윗은 지금 선택지가 없는 좁은 곳에 몰려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처한 곤란한 상황이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을 배경으로 하는 듯합니다.
다윗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주보다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 더하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이 하는 말의 전제를 생각해 보자면
‘그들에겐 곡식이 있고 나에겐 곡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그들보다 기쁨이 더욱 충만하다’는 뜻의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그들이란 헛된 일과 거짓과 분노로 범죄하는 사람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엉뚱한 대상에게 제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율법에서 말씀하시는 대로라면 가뭄과 기근이란 백성들의 불순종과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징계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이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하게 내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겐 가뭄과 기근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켜볼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비를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야속함과 원망뿐입니다.
그리고 통치자인 다윗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며 원망을 쏟아냅니다.
백성들은 왕인 다윗의 명령과 위로와 격려에도 좀처럼 통제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을 맞이한 사람처럼 그야말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땅히 내려주셔야 할 선함을 베풀어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분노로 그들은 다른 방안을 찾아 나섭니다.
하나님이 복과 풍요를 주시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 풍성함을 내려줄 다른 존재를 찾아 의지하려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기 이전부터 그 땅에 풍요와 풍성함을 주었다고 믿는 바알과 아세라를 찾아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제사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님을 떠나고 실패하여 망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에겐 곡식과 포도주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오히려 곡식과 포도주를 얻은 그들을 바라보며 다윗의 곁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사람들의 마음마저 흔들리려 합니다.
시편 4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한 다윗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곤란함 속에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너그럽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너그럽게 하셨다는 뜻의 히브리어 ‘라하브’는 넓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선택지가 없고 피할 곳이 없는 좁디좁은 막다른 길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다윗은 넓은 길에 다다르게 하십니다.
새롭고 산 길에 닿게 하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환란과 곤란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을 잃지 않게 해준 것은 다윗의 기도였습니다.
다윗의 기도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부르셨다는 것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이 경건한 자는 다윗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를 바로 이 경건한 자 때문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경건한 자란 그리스도 예수의 예표적 표현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모든 곤란한 자에게 새롭고 산 길이요 넓은 생명의 길이 되어주십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아직 가뭄이 끝난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을 계속 찬양할 수 있습니다.
기쁨 가득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기도만이 어두운 밤과 같이 시간을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밤을 불안과 두려움과 원망으로 하얗게 지새우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쉬는 시간, 안식의 시간으로 누리게 합니다.
밤사이 쉬지 않고 우리를 지키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밤과 같은 어둠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을 맞이셨나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순간이신가요?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기쁨의 넓은 활로가 되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