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로 결심하시고 갈릴리를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길 위에서 궁중 속의 고독을 오롯이 느끼는 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예수를 따라나선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정작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서 쫓아가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는 체 저마다의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몸만 예수의 주변을 그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누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이란,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선포하신 복음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버림당하고 고난당하고 죽임당할 것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이란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기 위하여 자신을 부정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고 싶은 메시야에 대해 믿어왔던 지난날의 신앙을 내려놓고, 그렇게 쌓아 올린 자기의 인생 전체를 부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기대, 나의 신앙, 나의 공로, 나의 삶과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은 죽음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과정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십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던 나의 신앙과 공로와 고집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해 그 죽음으로써 나를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나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십자가의 길을 쫓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주를 쫓아오고 있는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실 길은 여우나 새보다도 안락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의 활보를 기대하던 사람들에겐 매우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징적으로 보았을 때 여우의 굴과 공중 새의 집은 각각 헤롯의 통치를 받는 나라와 로마의 통치를 받는 제국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셨었고,
신약 성경 곳곳에서 권력자들을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하기에 공중의 새는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의 은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적 표현으로써 예수님은 여우의 굴과 공중 새의 집과 같은 그런 세상의 나라에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머리 둘 곳 없다’는 표현으로 유비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법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머리 둘 곳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것들을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머리 둘 곳을 십자가로 정하셨습니다.
요19:30을 보면 십자가 위에 예수께서 머리를 숙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머리를 숙이셨다는 단어 ‘클리네’는 머리를 둔다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가 사용됩니다.
머리를 기대는 모습을 머리를 숙이는 모습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머리 기댈 곳 없다고 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머리를 십자가에 기대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성경은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십자가를 향하여 부르십니다.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하는 것은 그 위에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자신의 머리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언제나 핑계를 댑니다.
먼저 가족과 작별하겠다고 합니다.
먼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도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미래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죽은 자들이 장례하도록 내버려두라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실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시급하게 여기지 못하며 그의 삶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근본으로 삼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실체로서 인식하고 그 긴급성과 절대성을 의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어지는 사람만이 주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