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에는 파송 받은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놀라운 점은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곳이 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 장면 한 곳뿐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이 기쁨의 주체이시고 또한 기쁨으로 가득하신 분이시라는 표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성경 어디에서도 그가 웃으셨다거나 즐거워하셨다거나 기뻐하셨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쁨이나 행복, 즐거움 같은 단어가 예수님께 사용된 것은 오직 누가복음 10장뿐입니다.
성경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은 기쁨보단 슬픔에 더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그는 사망 권세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죄가 나사로에게 행했던 것처럼 온 인류에게 죽음과 슬픔을 가져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질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에도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통곡하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지만 자기 땅에서 영접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광야로 버림당하는 아사셀 양으로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배신당하고 배반당하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질고를 아는 분이셨습니다.
그의 슬픔은 가늠할 수 없는 우주적인 슬픔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시점에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직 구름떼처럼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여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다음해 이맘때쯤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는지 감히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십자가 사건 이후에 끝까지 예수를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오직 120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주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년 이맘때쯤엔 모두 떠나버리고 말리라는 것을 정작 예수님은 모르고 계셨던 것일까요?
미래에 벌어질 일을 모르셔서 이렇게 해맑게 기뻐하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두 아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잃어야만 하는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받아주시고 가르치시고 이끌어주시는 모든 사역은
그야말로 더욱 슬픔의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을 겪어오셨나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도 잃으셔야 했나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단 한 번을 제외하고선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듯합니다.
그 사명의 무게감을, 그 부담을, 그 상실감을, 그 슬픔을 홀로 짊어지시고 어찌 웃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슬픔은 이해될 듯하면서도 도저히 가늠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질고와 고난과 슬픔을 품고서 예수님은 어떻게 그토록 기뻐하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이 항복한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갓난아이에게는 드러나게 하심을 감사하셨습니다.
그 말은 슬기롭지 못하고 미련한 사람들만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로 작정 된 사람들에게 성령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총명한 사람들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고,
건강하고 성실한 될성부른 사람들이 얻는 구원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 봉사할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구원 얻는 게 아니며,
헌금으로 교회를 세울 재력 있는 사람들이 구원 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조건을 사람의 능력에 맡기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달려있다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적혀있기에, 갓난아기라 할지라도 구원을 결코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기쁨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실이 아니라 충만을 바라보실 수 있었기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아무리 슬픔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나라의 적힌 우리의 이름은 성령이 지켜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성령으로 주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