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은
그동안 열심히 율법을 순종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겐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분명 율법대로라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잘 지키던 사람들이 아닌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그가 정말 율법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흠 없는 사람이라면
율법에서 명한 대로 죄인들을 멀리하고 자신들의 수고를 치하하며 높여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을 힐난하시고
자신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어울리지 않아야 할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봐 온 한 율법 교사는
작정하고 예수의 인지부조화를 폭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율법에선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반문하셨고 율법 교사는 시간 낭비할 것 없이 정답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비결이라는 율법 교사의 대답에 예수님은 격하게 동의하셨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고 생각하고선
자신들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의 이웃이 누구냐’는 회심의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나 예수가 이 질문에도 율법에서 말하는 대상들, 곧 동포 형제들인 이스라엘을 이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리고 레위인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라고 대답한다면,
율법 교사는 이런 이웃 사랑에는 자신있었습니다.
예수가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율법 교사는 마지막 질문으로써 ‘그럼 누가 이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이니 하나님의 언약인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이웃이 될 수 없다는 대답을 예수로부터 이끌어내고,
그걸 빌미로 예수가 자신들과 달리 얼마나 옳지 못한 표리부동한 사람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계산된 대화의 함정을 모르실 리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가 원하고 있을 답변 대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율법 교사의 시험에 답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강도를 만나 거반 죽은 사람처럼 버려진 사람이 있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시체처럼 누워있는 남자를 보고선 그냥 지나갔다는 비유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당한 자를 지나간 것은 그들이 비도덕하고 비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상 시체를 만지는 자마다 부정해지기 때문인데, 이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될 수도 있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상징적인 설정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강도 만난 자를 살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이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그를 치료하고 여관에 두 데나리온을 주며 그를 맡겼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것은 사흘째는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율법 교사에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교사는 분명 ‘나의 이웃’에 대해 물었는데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대답하십니다.
‘나’는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자는 전적으로 무능력하여 먼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먼저 치료가 필요하고 먼저 사랑과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강도 만난 자가 외부의 손길로 구원을 얻어 죽음에서 건져내지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전적인 은혜뿐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어 살아나게 되었다면 이제부터 강도 만난 자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뿐입니다.
범죄하고 타락하여 사망의 권세 아래 죽어있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분이 누구이신가요?
우리의 악한 본성으로는 절대 그분을 사랑할 이웃으로 삼지 않았을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를 살리시려 자신이 대신 이스라엘에서 끊겨질 작정으로 시체를 만지고 보살펴 살려내신 분이 누구이신가요?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에게 돌아오신 분이 누구신가요?
포도주보다 붉은 피로 우리를 씻어주신 분이 누구신가요?
성령으로 기름 부어 의롭게 하신 분이 누구이신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진정한 이웃은 누구신가요?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이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 사랑만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