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중 예루살렘에서 매우 가까운 마을인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베다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 한 분만을 초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기본적으로 열두 명의 제자들뿐 아니라 칠십 명의 제자들도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르다가 바쁜 것은 당연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한 것은 여러 면에서 큰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도 봉사량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마르다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준비하는 동안,
마르다의 동생 마라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새 사라진 동생을 찾아 뒤늦게 주방에서 마르다가 나오는 모습을 보면,
마리아도 처음엔 언니를 도와 주방일을 섬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앉아계신 테이블을 세팅하러 나왔을 때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아 버린 모양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를 부르기 위해선 예수님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결국 마르다는 이렇게 분주한 순간에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있는 상황을
예수께서 왜 돌아봐 주시지 않느냐며 예수님께 서운함을 토로합니다.
어느덧 마르다의 서운함은 마리아에게뿐 아니라 예수님에게까지 닿아있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음식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분주한 것이니 음식 가짓수를 줄이든가 한 가지 종류만 하라고 조언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헬라어를 직역하자면 ‘필요한 건 오직 한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빼앗기지 않을 바로 그 좋은 편이란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필요한 단 한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을 좋은 것, 필요한 단 한 가지, 이토록 중요한 한 가지가 겨우 음식 가짓수를 말하는 것일 수는 없지요.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신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그 어떤 섬김의 봉사보다도 말씀의 자리 앞을 지키는 행동이 가장 필요한 유일한 것,
빼앗기지 않아야 할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예배냐 봉사냐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 답을 내려주시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의 의미를 먼저 규정한 체 본문의 이해에 접근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마르다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로서 앞선 문맥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진정한 이웃 되어주시는 예수를 사랑함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핵심이라는 문맥에서 마르다의 이야기를 본다면,
누구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의 주제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주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빼앗기지 않을 한 가지, 필요한 오직 한 가지는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여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가르치신 것이,
언제나 말씀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을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시는 가르침이었다면,
마르다는 당장 앞치마를 벗고 주방에서 나와 예수님 발치에 앉아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난 이후에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여전히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요12:1).
그것은 마르다가 정신을 못 차려서이거나, 성장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마르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일 년 후의 마르다는 마리아를 찾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와 예수님께 볼멘소리했을 때, 사실 마르다는 섬김의 목적을 잊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번거로운 일을 자처했습니다.
그것이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쁨이 아닌 서운함과 불평과 원망이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가 눈에 거슬리면서부터입니다.
사실 마르다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이었는데, 이제 마르다의 눈에는 자꾸 마리아가 밟힙니다.
주를 향한 사랑으로 시작한 일인데, 사람 때문에 그치게 됩니다.
처음엔 분명 주를 사랑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자 서운함과 실망이 예수님의 얼굴을 가려버립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사역이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사람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서운함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지금이 바로 예수를 사랑해야 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