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수사학적 질문들과 비유를 사용하여 기도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한남자가 한밤중에 친구네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자기 친구가 늦은 시간에 손님으로 방문하였는데 그를 대접할 떡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자기 집에 방문한 친구를 대접할 떡 세 덩이를 빌리기 위해
그는 엉뚱하게도 또 다른 친구네 집을 찾아와 온 가족을 깨워가며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참 무리하고 황당한 요구로 들립니다.
내 친구도 아닌 그의 친구를 위해 이 밤에 일어나 내 가족들의 아침거리를 내주어야 할 이유가 집주인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라면 이런 경우에, 가족들이 자고 있으니 일어나 줄 수 없다고 친구의 요청을 거절할 것이냐?’고 질문하십니다.
수사학적 질문이란 상식적인 대답으로써 확인된 진리의 전제를 쌓아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수사법입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무례하고 무리 되는 요구같이 들릴 뿐이지만,
사실 예수님이 이렇게 물어보신 것은,
이렇듯 무례하고 무리 되는 상황일지라도 떡을 내어주는 것이 너무나 마땅한 상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리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이라 할지라도,
이렇듯 무리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야 하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손님 접대에 언제나 진심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그들을 대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것은 율법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친구이기 이전에 손님이기 때문에 도와야 했습니다.
갑자기 방문했다는 그의 친구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라도
나를 찾아온 친구를 손님으로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친구가 아닐지라도 돕는 것이 마땅한데 하물며 친구 사이라면 돕는 것이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벗됨으로 인하여는 주지 않을지라도 간청함으로 인하여는 줄 것’이라고
본인이 던지신 수사학적 질문에 스스로 답하셨습니다.
여기서 ‘간청함’이란,
끈질기고 간절한 요청이나 포기하지 않는 소원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간청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나데이아’는 원래 ‘겸손이 없는, 경건이 없는, 부끄러움이 없는’이라는 뜻으로서
무례하고 뻔뻔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떡을 꾸어주는 친구의 입장이 아니라 떡을 꾸어야 하는 친구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만 이해되는 표현입니다.
율법상 당연히 도와주어야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지라도,
한밤중에 한 가족의 휴식을 방해하며 떡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사랑하는 친구를 먹일 힘이 없어 구걸해야 하는 자신의 무능력과 부끄러운 형편을 폭로해야 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구해야 한다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집을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친구입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찾아가는 곳이 친구의 집입니다.
친구이기에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과 수치를 이겨내고 찾아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밤에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은 ‘찐친’만이 할 수 있는 뻔뻔함인 것입니다.
즉 ‘뻔뻔함’이란 그런 요구가 당연할 만큼 막역한 사이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이 아니라 친구가 찾아왔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저 율법 때문만이었다면 친구라고 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그 뻔뻔함의 관계를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십니다.
기도란 구하는 것이고, 찾는 것이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에게 필요한 영육간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겸손함입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구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능력한 우리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찾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를 신뢰함으로 뻔뻔하게 그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뻔뻔함으로 찾아와 두드리는 이에게,
기도하는 그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좋은 것,
‘성령~!’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소원을 아뢰면 주님은 주의 소원을 이루십니다.
기도만 하면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것도 아닌데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가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친구 되신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
주의 소원을 우리의 소원이 되게 하십니다.